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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02 19:24 수정 : 2012.08.02 19:24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시청으로 항의방문하러 간 주민들을 선동하여 구호를 외치고 시청을 점거하는 등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는 것이 내게 적용된 피의사실의 요지였다. 수사관은 내게 왜 대표단을 꾸려서 면담을 요청하지 않고 떼로 몰려갔느냐고 물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고 답했다. 모욕당한 당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왜 불법이냐고 되물었더니, 떼로 몰려오는 것 자체가 불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무원의 공무집행은 그것이 단 1분이라도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먹먹했다. 내가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 어르신들은 7년 동안 고통받아왔다. 현장에서 공사가 시작된 작년 7월부터 13개월째, 헬기를 동원한 전방위적인 공사 강행 이후 1개월여째, 거의 매일처럼 전쟁 같은 나날들이다. 그들 노년의 평화가 엉망이 되었다. 그들이 빼앗긴 시간, 그들이 겪은 모욕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 1분도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공무, 단 한 치도 물러서서는 안 되는 국책사업, 소유자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빼앗아 가서는 다시 그 법의 이름으로 소유자를 겁박하는 이 법은 대체 무슨 법인가. 송전탑 공사 현장으로 가는 산을 오르며 어르신들이 이야기했다. 일곱살부터 지게 지고 이 산을 올랐다. 베잠방이에 황토물이 빠지지 않도록 일해서 이 농토를 일구었다. 그런데 법원에서 날아온 서류에는 자신이 채무자로, 한국전력이 채권자로 등재되어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이게 대체 무슨 법이냐고.

누구에게나 저항의 권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걸 행사하려면 10억짜리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거나, 하루 100만원씩 벌금을 물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천부의 권리마저 이 야비한 법 논리가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한 시골남자가 있다. 그는 지금 ‘법의 문’ 앞에 서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지기에게 제지당한다. ‘법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면서 왜 문지기가 있는 거지?’ 의문은 풀리지 않지만, 어쨌든 지금은 무조건 안 된단다. 남자는 제지당한 채 기다리는 길밖에 없다. 죽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문지기는 비켜서지 않는다. 죽기 전에 그는 물었다. ‘왜 문 앞에는 나밖에 없지?’라고. 문지기가 답한다. ‘이 입구는 당신만을 위한 것, 이제 나는 문을 닫겠소.’ 카프카의 짧은 소설 <법 앞에서>의 줄거리다.

남자가 평생토록 기다려서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죽음으로써 법의 문을 닫는 것이었다. 카프카는 이 소설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일까. 우리는 끝내 법의 문 안으로 진입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법의 문이 닫힌 바로 그 자리, 법의 문 바깥에 비로소 삶이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주인공 수학 교수가 말하듯, 법은 아름답다.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은 그 아름다움과 모순 없음으로 우리를 현혹하고 끝내 기만한다. 일생토록 기다려본들 ‘우리는’ 법의 문 안으로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스피노자와 홉스는 사회계약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홉스는 계약이 이루어지고 난 뒤 문제가 있더라도 계약은 파기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회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런 계약을 붙들고 있는 것은 웃기는 짓이라고 했다. 강도한테 돈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지금 돈 없으니 나중에 줄게’ 해 놓고는 나중에 정말로 줄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느 편인가. 나는 스피노자 편이다. 우리는 ‘진짜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법대로 사는 법’이 아니라, ‘인간으로 사는 법’이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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