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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21 19:14 수정 : 2012.08.21 19:14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장준하 선생의 유골이 공개됐다. 머리에 뚫린 지름 6㎝의 구멍은 영락없이 둔기에 의한 가격의 흔적으로 보인다. 검시를 담당한 법의학자가 암살과 추락사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은 가운데, 유가족은 암살의 가능성을 주장하며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현재로서는 그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기 힘들어 보인다.

사진의 암시 효과는 강렬하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름 6㎝의 원형 함몰은 거의 자동적으로 공사장에서 사용하는 해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재조사 요구에 대한 박근혜 후보의 대답은 단호했다.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현장, 목격자에 대한 조사가 그동안 이뤄지지 않았나. 그런 기록들이 있는 것을 봤다.”

암살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책임을 곧바로 박근혜 후보에게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게다가 그의 지적대로 이미 여러 차례 조사를 통해 ‘규명불가’의 결론이 내려진 바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공개되지 않은 새 단서가 나타났다면, 그보다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재조사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언젠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과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 박근혜 후보는 그 주장이 “가치없는 것이고 모함”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나, 그의 주장과 달리 인혁당 관련자들은 2007년 법원의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는 법원 판결 이후에도 자신의 발언을 사과하거나 철회하지 않았다.

장준하 선생에 관한 발언에는 당연히 이 인혁당 관련 발언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1975년 4월9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대법원 확정판결이 난 지 18시간 만에 즉결처형됐다. 형 선고 통지서는 대법원 선고보다 7시간 이르게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에 접수됐다. 이는 그 판결이 단순히 오심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는 ‘헌법을 수호’하는 데에 있다. 인혁당 사건은 민주헌정을 파괴한 유신의 산물이자 그것의 상징이다. 인혁당 사법살인을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곧 헌정을 부정하는 행위가 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이가 유신정권의 만행을 비호하는 것은 윤리적 추문을 넘어 정치적 도발이다.

5·16에 대한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경우에 따라서는 쿠데타도 묵인하거나 환영할 수 있다’는 견해는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 대통령직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의 행적을 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공직에 출마한 이상 자신의 사적 감정과 공적 입장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도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여차하면 친위 쿠데타로 제2의 유신체제를 도입할 수도 있다는 얘길까? 실제로 그의 위험한 생각이 공동체의 역사적 기억을 왜곡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어느 매체의 주문이다. “복합적인 안보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고육지책이 10월 유신이었음을 당당히 밝혀야 한다.”

참여율 사상 최저인 그들만의 선거에서 85%에 달하는 사상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 역시 유신시절 체육관 선거를 연상시킨다. 툭하면 반대자의 멱살을 잡는 열광적인 지지층은 그의 집권 후에 벌어질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게 만든다. 수령이 그리운 이들에게는 그게 달콤한 ‘추억’일지 모르나, 나머지 국민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악몽’이다.

‘과거를 말하지 말고 미래를 말하자.’ 박 후보의 말은 과거사에 관한 일본의 입장과 똑같다. 하지만 한-일 관계에서도 그렇듯이 여기서도 미래로 나아가려면 먼저 과거부터 정리해야 한다. 장준하 선생이 37년 만에 끔찍한 상처를 입은 두개골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을까?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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