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8.29 19:09
수정 : 2012.08.29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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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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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선배였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2006년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때 뜻하지 않게 선거캠프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정치의 현실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현실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는 선거과정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캠프에 처음 갔을 때는 각종 매체 출연과 특정한 장소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빽빽하게 짜인 일정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다소 흐르고 나서야 큰 선거에서는 유권자 개개인을 접촉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매체로 하여금 후보의 동선과 그 과정에서 던지는 발언을 보도하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것”이 선거전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후보의 동선과 그때 던질 말들은 세심하게 기획된다. “정해진 연기를 하고 끊임없이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우리의 신세가 떠돌이 유랑극단 같다”며 강 후보와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면 대중의 지지가 중요한 모든 직업은 ‘동선을 통하여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일상적인 업무의 하나이고 그 점에서 정치인과 유명 연예인의 삶은 놀랄 만큼 닮은 점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철저히 기획된 연출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코스프레’ 또는 ‘행위예술’의 성격을 피할 수 없다. 코스프레라는 말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캐릭터 또는 인기 연예인들의 의상을 꾸며 입고 어떤 장소에서 놀거나 전시하는 행위”를 뜻하는데, 코스튬 플레이 또는 분장놀이라고도 한다. 정치인의 일상은 일련의 코스프레로 점철된다. ‘아이를 안고 환히 웃는 모습’, ‘시장에서 어묵을 먹는 모습’, ‘뜬금없는 독도 방문’ 등이 다 무엇이겠는가. 어찌 보면 유치하지만 민주주의의 일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박근혜 의원의 파격적인 행보들이 논란이 되고 있다. 그는 봉하마을, 전태일재단 그리고 전태일 동상을 방문하며 통합의 코스프레를 연출하고 있다. 그런 일련의 ‘퍼포먼스’가 던지는 메시지가 진실한 것이라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낱 코스프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많은 증거가 있다. 그는 이 정부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었고, 이제 여당의 대선후보로서 가장 힘센 사람이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계기가 되었던 편향된 검찰수사의 방관자이며, 극심한 반노동자 정책의 동조자이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서고자 하면 당장이라도 착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야당들이 반대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는 하지 않는다.
이처럼 그가 현재의 모순된 구조에 철저히 기여하고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대중에게 보여지는 겉치레를 위하여 피해자들을 방문한다면 그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가혹하게 버려지고 나서 심지어 연출에 이용된다면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급기야 그가 죽은 전태일의 동상에 헌화하고자 할 때, 살아있는 노동자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제지하려다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김진숙씨에 따르면, 그 노동자는 3년간 22차례나 동료들의 장례를 치렀고, 며칠 전에도 박근혜 의원을 만나려다가 연행된 쌍용자동차의 지부장이라고 한다.
예술비평가 수전 손택은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라고 썼다. 정치인의 행보는 행위예술적 요소가 있는 코스프레로서 어느 정도는 ‘연출된 유혹’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죽었고 지금 죽어가고 있기에 그 코스프레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을 안기는 일방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적어도 ‘진실한 유혹’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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