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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04 19:16 수정 : 2012.09.04 19:16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 주말 대학로 연우소극장에 한 연극을 두번 보러 갔다. 한번은 이야기 속의 당사자들과, 한번은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이야기는 이 땅에 살았지만 사회적 낙인 때문에 가슴에 저마다 둑을 쌓고 숨어 지내왔던 사람들,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에 대한 것이다. 연극은 담담하지만 진지한 자세로 그녀들의 가슴에 고인 눈물의 호수로 우리를 초대한다.

단순히 사회적 억압에 대한 비극적 스토리가 아니라 나와 너의 이야기로 사회와 소통하고자 하는 이 연극은 시·공간과 나이, 계층의 간극을 넘어 공통의 경험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여자들과 남성중심적 위계질서에 굴종할 뿐 그 여성들 주변에만 맴도는 남자들의 삶을 직조한다. 현실에 기반을 두었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 때문에 더 픽션 같고, 픽션이란 형식을 빌려 왔으나 너무 리얼한 이야기에 관객들과 당사자들은 함께 웃고 울다 결국 감정이 복받쳤다.

대한민국의 기지촌은 일제강점기 공창제라는 정부 주도의 근대적 성매매 시스템 위에 이식된 미군문화, 미군정과 전쟁을 통해 증폭된 가난, 근대국가 건설과 군사정권, 경제개발과 국가발전 과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기지촌은 단순히 여성의 몸을 사고파는 성매매의 차원을 넘어 식민주의, 군사주의, 제국주의, 가부장제, 자본주의, 계급과 인종 등 복잡한 층위의 이데올로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지촌을 통해 미국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 고립된 지역에서 미군들의 성적 욕구를 안전하게 해결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한국 정부는 국가경제와 안보를 담보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의 성산업 형태, 기형적 산업발달,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연결된 기지촌의 문제를 미군기지만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써 국가의 문제라기보다 특정 지역의 문제이자 개인의 문제로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기지촌은 ‘퇴폐적인 미군문화, 더러운 양공주, 마약과 섹스로 얼룩진’ 고립된 섬으로 존재하면서 이후 대한민국 국민에게 성적·도덕적 경종을 울려주거나, 제국에 대한 분노를 촉발할 수 있는 선택적 상징으로만 간간이 사용되어왔다.

연극은 그동안 아무도 말하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치욕스러운 비밀’, 그리고 이를 부인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분열적인 우리 스스로의 인식과 태도, 그럼에도 문득문득 의식의 층위로 떠오르는 기억과 망각 사이의 부유물들을 직시하고자 한다. 제국(들)과 공모하면서 여성의 몸/성을 거래한 민족국가와, ‘필요악’으로서 존재해야 하지만 구분되고 격리되어야 할 ‘더러운 몸’으로 낙인을 찍고 차별을 정당화해온 한국 가부장의 이중적 성인식과 태도에 딴죽을 건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 미군기지촌, 외국 여성의 성매매가 완전히 변별적인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럽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라는 점 또한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나와 타자,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공식적 역사와 비공식적 현실 사이의 거리를 관통하여, 그들의 문제를 통해 나의 문제를 직시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나의 고통을 해석하게 한다.

나는 연극을 보는 내내 알고자 하지만 알 수 없는 그녀들의 삶 속으로 자맥질하며 집단적 무의식에 각인되어온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번 주말, 현재의 모순적인 ‘나’를 구성하는 중층적 기억의 층위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보면 어떨까. 그들의 노동에 기생하여 살아왔지만 그녀들 주위에 둑을 쌓고 슬픔의 호수를 만든 부끄러운 자화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결국 과거에 대한 성찰과 미래를 위한 행동은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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