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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01 19:09 수정 : 2012.11.01 19:09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우연의 일치겠지. 지난 총선 때의 일이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하는 ‘말꾼이 아니라, 일꾼을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옛날 신문을 보다가, 똑같은 문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바로 1971년 4월이다. 대선 직전 공화당 정치광고 말이다. 조직이 강한 공화당이 정치적 논쟁을 피하기 위해 썼던 수법이다.

대선국면에서 아주 오래된 과거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공산주의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김무성 선대본부장의 말일까? 사실은 1971년 4월 공화당의 김종필 부총재가 선거유세에서 한 말이다. “가장 경계할 것은 혼란이라는 내부의 적이다.” 박근혜 후보가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면서 한 말일까? 박정희 후보가 선거 하루 전날 방송 연설에서 한 말이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토론은 피하고, 야당 후보를 빨갱이로 몰고, 국민들에게 정치혐오감을 부추기는 선거 전략 말이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을 보자. 비밀회담도 비밀녹취록도 없다는 것은 이미 사실로 밝혀졌다. 노무현 정부가 대화록을 폐기했다는 주장도 거짓말로 드러났다. 이 정도면 박근혜 후보가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마치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발언을 한 것처럼 연막을 치는 비열한 수법이 계속되고 있다. 북방한계선을 유지하면서, 서해 평화정착을 추진한다는 것이 당시 정부의 공식 입장이었다. 정상회담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런 게 바로 색깔론이고 북풍이 아니면 무엇인가? 1971년에도 그랬다. 박정희 후보는 “작금의 정세는 마치 6·25 사변 전야”라고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대선을 사흘 앞두고 국방부는 ‘북괴의 도발 징후’를 이유로 전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북한군의 특이동향을 발견하지 못했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발표되면서 데탕트(긴장 완화)가 시작된 시점이다. 미국은 당시 한국의 정보판단을 ‘국내정치적 정보왜곡’이라고 평가했다.

아직도 이 땅에서 색깔론의 유령과 대면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마지막 출마’라고 강조했지만, 결국 집권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독재의 길로 내달렸다. 기억하지 못하면 역사는 반복된다. 2012년 현재 박근혜 후보도 거짓말에 편승하면서 색깔론에 기대고 있다. 그러면서 남북관계의 신뢰를 말한다. 색깔본색이 떠받치는 화려한 공약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고인 물은 썩는다. 보수의 퇴행적 지체가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진보니 중도니 하는 개념도 사실은 아주 오래된 한국의 보수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에 현대적 의미의 보수가 어디에 있는가? 2012년은 1971년처럼 전환기다. 1971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정부는 국제적인 데탕트를 활용해서 동-서독 관계를 정상화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데탕트를 국내정치적 집권연장의 도구로 활용했다. 2012년 그들은 여전히 오랫동안 멈춘 시계로 선거를 한다. 시대착오다.

1971년 김대중 후보는 관권과 금권, 언론의 일방적인 편파보도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쟁점을 피해가지 않았다. 부유세 도입을 내걸고, 남북교류와 향토예비군 폐지를 주장했다. 그래서 결과가 뻔한 선거를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을 어떻게 그때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시대는 변했다. 국민들이 무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배우는 어디에 있는가? 색깔론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 결국 정치가 내 삶에 개입한다는 유신의 서늘한 교훈을.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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