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04 19:10
수정 : 2012.11.0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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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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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정국이 무르익으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공약들이 쏟아져 나온다. 학생들의 소질과 끼를 살리겠다, 사교육비를 축소하겠다, 특목고 우선선발을 폐지하겠다, 일제고사를 폐지하겠다…. 그런데 중요한 열쇳말이 하나 빠졌다. 바로 ‘학생인권’이다. 교육운동진영의 오랜 분투와 김상곤, 곽노현 등 민선교육감의 혁신교육정책이 어우러져 학생인권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이 소중한 성과물을 디딤돌 삼아 한 발짝 더 나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이지 않는다.
다들 사교육비를 축소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사교육 근절이 사회 전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라면, 사교육이 교육의 수월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는 반론에 부딪히기 십상이다. 사교육이 가계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라면, 사교육의 공급가격을 낮춰서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사교육을 받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사교육이 학생들이 적절하게 휴식하고 문화생활을 향유할 권리, 자신의 소질과 적성 및 환경에 합당한 학습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러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사교육이 발 딛고 서 있는 입시제도와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고, 학생들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문화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반론도 있겠지만, 학생인권이라는 열쇳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사교육을 받을 권리’는 ‘학생’의 권리일 수 없다고 논박할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사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어른’은 봤어도 그런 주장을 하는 ‘학생’은 본 적이 없다. 사교육의 공급가격이 낮아지면 ‘어른’들의 고통이 삭감되겠지만, ‘학생’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학생’의 인권을 말하고 있다.
체벌이 금지되는 등 학생인권정책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학생들 ‘관리’가 힘들다고 한다. 작금의 학교현실에서는 체벌 없는 학생지도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의 해법은 체벌의 부활이 아니라, 교사가 체벌 없이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몇몇 교육청에서 교사들의 행정업무 부담을 줄이려고 고심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학생인권정책은 인권이라는 관념을 무작정 학교현장에 욱여넣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인권의 실현이 가능하게 하기 위한 여건을 적극적으로 창출하는 일이었다.
학교폭력 문제에 ‘인권’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체벌 등 ‘통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은 학생들을 또다른 폭력과 부당한 권위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런 문화에 익숙한 학생들이 일탈을 감행할 때, 그 선택지 중 하나가 바로 다른 약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이다. 자신의 인권을 존중받아본 사람만이 타인의 인권도 존중할 수 있다. 학교폭력 문제는 학교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런 인권존중 문화를 만드는 데 실패했다는 징표다. 그래서 교육은 자신의 인권과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감수성을 키우고 그것을 학교현장에 정착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학생인권을 주장했던 취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2012년 대한민국은 다시 기로에 서 있다. 학생인권이라는 화두가 지역에서 출발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려면 중앙정부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하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법’으로 발전되어야 하고, 학생인권의 실현을 위한 중앙정부 차원의 대책도 절실하다. 그동안 쌓아온 이 성과물을 어떻게 발전시키려고 하는지,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홍성수 교수가 권영숙 서울대 연구교수의 뒤를 이어 필자로 참여합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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