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06 19:10
수정 : 2012.11.0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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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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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물학적 ‘여성’이 새로운 대표성을 갖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언제부터인가 ‘여성 대통령’ 공감론이 확대되는 현상과 연관된다. 그동안 여성성의 결핍을 공식적 기호로 차용해오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이제 스스로 여성성을 과잉 차용하면서 선거 전략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관념적으로 여성이라는 것과 생물학적 여성, 정치적 의미의 여성의 의미가 모호하게 연결되는 시대로 후퇴한 지금, 다시금 그 ‘여성’이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영국의 여성학자인 니라 유발-데이비스가 지적했듯, 신자유주의 역설 가운데 하나는 공식적으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장려하는 반면, ‘자유시장’과 ‘최소정부’를 추구하면서 복지국가로서의 기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그간 여성주의자들이 진보와 해방의 기호화에 사용했던 ‘여성’이라는 범주는 가장 본질주의적인 생물학적 남녀 차이로 환원되고, 기계적 평등과 차이의 의제로 퇴보하고 있다.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의 등장이 모든 것을 보장해줄 수 있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주지하다시피 그간 여성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차이에 기반한 차별과 배제, 위계질서에 반대하고, 조건의 차이가 본질적인 것이거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식을 정치적으로 제고하는 데 기여해왔다. 차이들에서 비롯한 차별과 억압의 경험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다는 인식은 정치적 변혁을 위한 투쟁과 노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특정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타자, 소수자, 약자들의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꾀하기 위함이다.
더 나아가 최근 여성주의자들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 신자유주의와 신제국주의적 힘의 논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국가간, 주체간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식민지 잔재와 잠재적 식민성의 해체를 위한 실천력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이동과 구성 방식, 권력과 지식생산 양식의 관계, 민족주의와 여성의 관계 등을 탐구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방적 힘의 역학관계가 생산해내는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와 저항, 전복이라는 공동의 이해 속에 다양한 ‘진보집단’들과 전략적 연대를 지향해왔던 것이다. 잠재적 몰성성 및 남성우월주의의 한계를 노정하는 수많은 개인 및 집단들과의 긴장과 협상은 여성주의자들에게는 일상의 투쟁이 된다.
따라서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 의식을 지니지 않듯, ‘여성’으로 타고났다고 해서 여성주의 의식을 자연적으로 습득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가 처한 위치성에 대한 재고와 성찰, 위치성의 배경과 원인, 타자에 대한 감수성과 사회변화를 위한 열망과 노력이 없다면 그 ‘여성’은 어떠한 다른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대변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여성’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계급, 인종, 섹슈얼리티, 민족, 종교 등에 따라 다양한 경험의 층위를 지닌 집단들의 잠정적 묶음일 뿐이다.
이제 다시 묻는다. ‘여성’ 대통령의 등장을 지지하는 사람들 스스로에게. 그 ‘여성’은 어떤 여성이며 어떤 여성들을 대변할 수 있는가라고. 이는 어떤 ‘여성’이 어떻게 유인, 활용, 배제되는지, 그 방식과 과정에 대한 엄밀한 관찰과 정치적인 작업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효율성과 경쟁력, 건설과 (신)발전주의의 논리로 수렴되고, 진보/보수의 의미가 이념적 차원에서 정치적 함의를 잃어버린 시점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한 ‘진보적 연대’란 과연 무엇인지 또한 되짚어보게 한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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