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1.15 19:19
수정 : 2012.11.15 19:19
|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
이렇게 되리라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지만, 대통령선거는 ‘후보 단일화’ 단막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혼사 장애’를 모티프로 하는 이 흥미로운 통속극에서 두 배우는 ‘결혼이냐 결별이냐’ 기로에 선 연인들의 감정선을 아직까지는 잘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대선 극장’의 한쪽에서 누군가가 ‘지금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면 어떤 이는 ‘시끄럽다’ 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지방 방송 꺼라’ 할 것이고, 생각 있는 이들은 ‘드라마 끝나면 이야기하자’고 할 것이다.
후보자들의 교육 분야 공약을 살펴보았다. 거기에 ‘지금 우리 아이들의 삶’은 없었다. 나는 퇴직 뒤 지난 1년 동안 곳곳의 강연장에서 자기 자식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적지 않은 부모들과 만나야 했다. 그들의 간절한 눈빛, 세상에 대한 공포, 그 소리 없는 절규를 들으며 나는 이 사회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혼자 먹어야 하는 급식 때문에 학교가 무섭고,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 모두가 자신을 병신으로 왕따로 손가락질할 것이라는 공포에 젖어 회칠된 잿빛의 벽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 시험 스트레스로 손톱을 물어뜯고 수시로 자살충동에 휩싸여 일거수일투족을 초조하게 감시해야 하는 아이. 부모는 내 자식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를 물었다. 내가 무슨 답을 하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방식으로 아이를 키워왔는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를 묻고 있는 총체적인 질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거대한 항공모함이 서서히 움직이듯 오랜 시간 동안의 사회적 토론과 방향 전환을 위한 예열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곳곳에서 아이들이 죽어나가고 있지 않은가. 긴급하게 불을 끄고 항공모함의 시동을 걸어 우선 방향부터 틀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학교의 일상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 오늘날 학교에서 수업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교사들의 선의와 자질, 노력 여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교육을 통한 학벌 획득, 계층 이동과 같은 물질적 유인은 상위 5%든 하위 5%든 똑같이 비정규직이라는 현실 속에서 이미 무너져 내렸다. ‘이런 따위 재미없는 공부를 열두시간 한들 내게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들 이렇게 나를 쪼는 거야.’ 아이들은 이런 스트레스에서 친구들을 쪼고, 학교를 들이받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함보다 존재감 없는’ 다수의 아이들은 그저 줄창 엎드려 자는 것이다.
학교의 일상, 아이들의 일상의 조건을 변혁해야 한다. 책상머리에 아이들을 강제로 앉혀두는 물리적 시간대를 어떻게든 줄여야 한다. 따돌림과 폭력을 가능케 하는 폭폭한 학교생활의 ‘공부’ 시간을 줄여 ‘몸’을 쓸 수 있도록,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간지옥을 벗어나 ‘무위의 시간’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놀게 하고, 몸을 쓰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교육과정의 변혁으로써 가능하다. 국·영·수 같은 도구교과의 이수 단위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고, 아이들이 오후 3시가 되면 교실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누구는 음악실에 클라리넷을 배우러, 누구는 농구 클럽으로, 또 누구는 학교 농장에 두엄을 갈아 넣거나 양로원 청소봉사하러 가게 하는 것이다. 이도 저도 싫은 아이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을 할 자유를 주자는 것이다.
만명을 먹여 살릴 한명의 인재만 잘 키우면 된다고 인정하는 사회에서 왜들 이렇게 나머지 만명의 아이들을 붙잡아 집요하게 가두어 놓고 있는지, 나는 그게 늘 불가사의했다. 아이들은 지금 이렇게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몸을 쓰고 싶단 말이다, 몸을.’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