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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22 19:22 수정 : 2012.11.23 08:56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2년 전 오늘, 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그날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북한의 잘못된 행위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동시에 말로만 안보를 외치던 자들의 무능을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해법이다. 서해 5도를 요새로 만들면 해결될까? 아니라는 증거가 여기 있다. 바로 대만(타이완)의 진먼섬이다. 이명박 정부는 서해 5도의 시사점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냉전의 섬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의 진먼은 양안 교류의 상징이고, 평화의 섬으로 변했다. 왜 진먼의 현재에는 눈감고 사라진 과거에만 집착하는가?

연평도의 오늘처럼 과거의 진먼섬은 전쟁터였다. 1958년 8월23일부터 44일간 그곳에 47만발의 포탄이 쏟아졌다. 한때 10만 이상의 대만 군인들이 주둔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거대한 지하요새와 방공호가 관광지로 변하고, 중국 관광객들이 저마다 포탄으로 만든 기념품을 사가는 ‘역설의 공간’으로 변했을까?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1980년 중국은 진먼의 맞은편인 샤먼을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진먼이 더는 전방초소가 아니라 협력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진먼과 샤먼의 거리처럼 양안관계는 변화했다. 처음에는 멀었다. 1987년 대만 정부가 대륙의 친척 방문을 허용했을 때, 진먼 사람들은 1.8㎞에 불과한 눈앞의 바다를 건너갈 수 없었다. 우선 진먼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베이로 가서 홍콩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다시 샤먼으로 갔다. 코앞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2000㎞를 돌아갔다.

2001년 마침내 진먼과 샤먼 사이에 여객선이 취항했다. 제한된 범위지만 양안은 통상·통행·통신에 합의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했다. 그 배로 2011년까지 700만명이 오고 갔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더 가까워질 것이다. 올해 1월 국민당의 마잉주가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진먼과 샤먼 사이에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진먼 사람들의 오랜 숙원사업이다. 다리는 평화와 교류를 실어 나르고, 지역경제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자동차로 10분이면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2010년 양안이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했을 때, 사람들은 차이완(Chiwan) 시대의 개막이라고 평가했다. 정치는 차가웠지만, 경제는 뜨거운 정경분리 정책의 성과다. 당시 중국은 양리(讓利), 즉 이익을 양보했다. 개방품목 조정에서 물러섰고, 농산물 개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중국은 경제를 통한 정치의 변화를 추구했다. 대만은 물론 경제위기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2009년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1.8%였다. 동아시아 경제통합 대열에서 낙오할 것이라는 위기감도 작용했다. 여론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지만, 성과는 만족할 만하다. 2010년 경제협력기본협정 체결 후 경제성장률은 10.7%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세계적 경제위기에도 4% 성장률을 유지했다.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자는 주장을 현실성이 없다고 비난하거나 색깔을 칠하려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진먼을 보라. 민진당이든 국민당이든 대만 정치인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익을 앞세웠다. 평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여기 진먼이 걸어온 길이 있지 않은가? 아는가? 우리는 이미 2007년 정상회담에서 진먼의 길을 합의했다. 바로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다. 서해의 미래를 말하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약속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여전히 진먼의 과거로 서해를 보는 시각도 철학의 빈곤이다. 나라를 맡을 자격이 없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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