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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9 19:07 수정 : 2013.01.09 19:07

김중미 작가·기차길옆작은학교 상근자

1992년 1월 중고등부 수업이 끝난 밤 10시에 여섯 달 된 딸아이를 업고 공부방을 나섰다. 내가 간 곳은 6번지 후미진 골목 끝에 있는 미용실이었다. 나와 동갑내기였던 미용사는 미용실에 딸린 단칸방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 늦게 파마 손님이 오는 바람에 세 살, 한 살 된 두 딸의 저녁 시간을 놓쳤다고 했다. 이미 과자 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운 큰아이는 밥을 안 먹겠다고 떼를 부리고 작은아이는 젖병을 문 채 졸았다. 지친 그이와 육아문제, 주거문제, 불안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하는 여성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대변해줄 정치인이 필요하다는 데까지 갔다.

며칠 뒤 그이는 만석동에 있는 목재회사의 노조위원장이며 만석동 토박이인 남편을 데리고 공부방을 찾아왔다. 그날부터 공부방 아이들의 부모들과 함께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지지하는 후보는 민중당 후보였다. 우리 중 누구도 그 후보나 당원들과 안면조차 없었지만 우리 힘으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을 대변할 정치인을 뽑기 위해 뭉쳤다. 전라도, 충청도에서 이농한 노동자들이었던 공부방 부모들은 잔업이 끝난 밤 10시부터 골목을 누비며 사람들을 만났다. 난생처음 자신들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에 밝고 힘찼다. 후보자와 당에서는 무조건 당선을 위해 뛴다고 말했지만 아버지 어머니들은 미래를 위해 뛰었다.

끝내 총선은 실패했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다. 낮은 득표율 때문에 당이 해체되었을 때도 좌절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92년 제14대 총선은 꿈을 이루기 위한 시작일 뿐이었다. 가난한 민중인 부모들은 멀리 보고 인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농민·도시빈민을 대표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들은 쉽게 패배를 말했고, 그 지도부는 민주자유당으로 백기투항해 들어갔다.

그 뒤로 다섯 번의 대통령 선거와 다섯 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들은 열매를 맺기는커녕 뿌리마저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우리 편’에 대해 점차 기대를 접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변함없이 만석동에 남아 아이들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작년 연말, 이틀여를 분노와 허탈감으로 보냈다. 딱 이틀만 그렇게 보내고 일어났다. 실패니 좌절이니 하는 말을 되뇌고 누군가를 탓하며 헛된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선거기간 동안 내 이웃의 대부분은 박근혜 당선인이 ‘집, 밥, 미래’를 책임져 줄 거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식당에서, 건물 지하에서 노동을 쉬지 않는 이들이었다. 에스엔에스(SNS)로 정보를 공유하기는커녕 저녁 8시, 9시 뉴스조차 챙겨 볼 여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48%에 속한 많은 이들이 그들을 무지하다고 비난했지만 나는 그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20년 전 만났던 그 동갑내기 미용사는 지금도 동네 미용실에서 할머니들에게 파마를 해주고, 그의 남편은 공구상가의 점원으로 일한다. 사는 게 힘들기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편이 될 정치권력을 꿈꾸지 않는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 전액을 학자금 대출로 낸 그이의 두 딸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그 꿈을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더는 미안하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 20년 전 그때, 골목골목을 다니며 이웃을 만나던 그 열정과 그 부지런함을 되찾을 작정이다. 그리고 내 글쓰기가 가난한 내 이웃과 아이들에게 더 쉽고 분명하게 다가가도록 단순해지려 한다. 진실은 쉽고 단순하다. 그 단순하고 분명한 일에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하면 좋겠다.

2012년은 지났고 2013년이 시작되었다.

김중미 작가·기차길옆작은학교 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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