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22 19:43
수정 : 2013.01.2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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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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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선거, 2012년의 총선과 대선으로 이어지는 선거정치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난 뒤 사람들은 잠시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다. 하지만 1년 뒤면 지방선거가 있고, 곧 다시 총선, 대선 모드다. 선거는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제도다. 하지만 우리 사회 전체가 선거에 휘둘려 세월을 보내는 것이 민주주의의 참뜻을 구현하는 길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제도정치의 위기를 말하는 게 유행처럼 됐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진행된 것은 선거정치의 소용돌이가 시민사회의 인적·담론적·조직적 에너지를 흡입해온 과정이었다. 지금 흔들리는 건 제도정치가 아니라 민주통합당이다. 강화된 건 시민사회의 정치력이 아니라 여론의 힘이다. 정치질서를 재편할 시민사회의 역량이 약화된 가운데, 야권 시민들은 자생적 여론정치로 제도정치의 힘의 불균형을 힘겹게 보정했다. 야권정치는 시민들에게 기생하며 무늬만 혁신인 변형주의 정치를 반복했다.
놀라운 것은 이 기생적 야권정치가 선거국면에서 사회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이명박 정권 초반에는 여론이 정치를 압박했지만, 중반기를 넘으면서 선거정치의 고유한 다이내믹이 모든 것을 삼켰다. 여론지형을 변화시키는 시민들의 주체적 힘은 위축됐고, 정치인들의 행보에 따라 오르내리는 여론조사 결과에 시선이 집중됐다. 시민은 주체에서 객체로, 주연에서 관객으로 바뀌었다. 정치를 바꾸자는 능동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수동태로 변했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시민들의 요구를 구체화하고 의제화하는 힘을 발휘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독립적 행위자가 아니라 도우미·중재자에 만족했다. 정치권과 인적 연계가 깊어졌고, 사람들은 각 캠프로 빠져나갔다. 시민사회 리더들이 정치인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시민사회의 도전을 대표한 게 아니라 정치권에 의해 선택받았다. 이들의 정책적 능력과는 별개로, 제도정치의 낡은 구조는 변하지 않았고 시민사회의 공백은 커졌다는 불편한 진실은 남는다.
결국 나중에는 야권정치의 무능과 무기력을 교정하고 상쇄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링에 오른 플레이어들을 응원하고 채근하는 일밖에 없었다. 스스로 링에 올라 게임의 규칙과 조건을 바꾸지 못했다. 아무도 흥이 나지 않았고, 선거판의 주인이라고 느낄 수 없었다. 이렇게 가라앉는 분위기에서 이기는 선거는 없다. 정치계급에 모든 힘을 실어준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패배였다.
반대의 역설이 있다. 미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재선을 가능케 한 중요한 기반이 월가점령운동에 따른 여론 이동이었음은 잘 알려진 바다. 보수 풀뿌리 운동인 티파티 운동이 선거 스케줄에 따라 공화당 정치인들과 협력하면서 신뢰를 잃어갔던 데 반해, 월가점령운동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미국 사회의 문제와 과제를 치열하게 이슈화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것이 오바마를 도왔다는 사실이다.
이 ‘이중의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시민사회가 소박한 권력의지 하나로 정치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지면 정치혁신도 좌절하고 시민사회도 힘을 잃는다. 시민사회가 정치를 바꾸는 소용돌이가 될 때, 비로소 정치의 근본 환경이 변화한다. 정치의 개념, 정치의 가능성의 장이 확대된다.
시민사회는 정치적이어야 한다. 정치적 올바름과 그름을 타협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시민사회는 또한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한다. 권력정치의 주변인이 아니라 시민정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민사회가 추구해야 할 정치참여의 기본방향이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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