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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28 19:22 수정 : 2013.01.28 19:22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서점에서 아무 심리학책이나 집어서 펼쳐 보시라. 모르는 사람, 배우자, 친구처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들과의 관계는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런데 부모의 자식 돌보기를 제외하면, 우리가 가족이나 친척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마치 형제, 조부모, 손주, 삼촌, 이모, 조카, 사촌과의 관계는 비친족과의 관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넌지시 주장하는 듯하다.

물론, 우리는 모두 안다. 피붙이는 남남보다 더 특별한 존재임을. 그렇지 않다면야 왜 설날 연휴에 온 국민이 극심한 차량 정체를 감수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민족 대이동이 벌어지겠는가? 왜 손주에게 세뱃돈을 주려고 신권을 준비하는 노부모의 얼굴에 그토록 환한 미소가 번지겠는가?

진화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혈연끼리는 일정한 확률로 유전자를 공유한다. 비친족끼리는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유전자가 개체로 하여금 그 개체의 혈연을 돕게 한다면, 그 유전자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복제본에게 도움을 줬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줬을 수도 있다’고 모호하게 표현한 까닭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을 확률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혈연에게 주는 도움이 상당히 크다면, 혈연을 돕게 하는 유전자는 자연선택되어 다음 세대에 널리 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방금 밥을 먹어 배가 부르다. 친동생은 며칠째 굶었다. 형제 사이에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50%다. 이제 배고픈 동생을 불쌍히 여겨 내 찐빵을 동생에게 양보하게 하는 유전자를 생각해 보자. 찐빵을 포기함으로써 나는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지만, 아사 직전이던 동생이 찐빵을 받아 얻는 이득은 필시 내 손실보다 두 배 이상일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배부른 형이 배고픈 동생에게 찐빵을 양보하게 하는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파될 수 있다.

두 혈연이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가까운 혈연일수록 높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50%이고, 형제자매 사이도 50%이다. 조부모와 손주는 25%, 삼촌·이모와 조카는 25%, 그리고 사촌 사이는 12.5%이다. 이는 찐빵을 포기함으로써 내가 입는 손실보다 내 사촌이 찐빵을 받아서 얻는 이득이 적어도 손실의 8배는 되어야 내 찐빵을 선뜻 사촌에게 양보하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왜 가까운 혈연을 먼 혈연보다 더 친하게 여기는지 이로부터 알 수 있다. 반면에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는 배우자, 친구, 직장 동료를 위해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진정한 희생을 하기란 불가능하다.

혈연끼리는 유전적 이해관계를 부분적으로 공유한다는 말이 설날 연휴에 온 가족이 모이면 마냥 웃음꽃이 만발할 수밖에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조금 공유할 뿐이지 완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전자를 공유하는 탓에 친척의 학교 성적, 연애, 취업, 결혼 및 출산 같은 중요한 인생사는 나의 진화적 성공에도 영향을 끼친다. 옆집 총각이 결혼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해도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내 조카나 손주가 평생 혼자 살기로 했다면 나에게도 큰 손실이다.

친척 어르신들이 평소에는 별로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명절 때 오랜만에 만나기만 하면 남의 취업, 결혼, 출산, 육아 등을 놓고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통에 스트레스를 받는가? 그렇다면 친척들과 나의 유전적 이해관계가 원래부터 온전히 겹쳐질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기 바란다. 적어도 내가 결혼하건 말건 별로 신경 안 쓰는 친구들보다, 내 피붙이들은 나의 행복을 진정으로 바라게끔 진화한 사람들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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