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2.20 19:12
수정 : 2013.02.2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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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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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내과에 근무하는 후배와 점심을 함께 했다. 토요일이라 와인 한 병을 기분 좋게 비웠다. 우리의 이야기도 열기를 띠며 최근 의료계의 두 가지 뜨거운 뉴스로 흘러갔다.
하나는 임박한 인턴제 폐지 입법예고에 관한 것이다. 밤낮없이 불 켜진 채 돌아가는 대형병원에서 한밤중 환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선가 짜잔 하고 나타나는 의사가 인턴이다. 심장마비 환자의 심폐소생술, 에이즈 환자의 채혈, 하반신 마비로 생긴 변비 환자의 딱딱하게 굳은 똥을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 등등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은 ‘인턴 시킨다’. 고전 유머를 빌리자면, 인턴은 의대에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 때 등장하는 인물이다. 바야흐로 그 인턴이 전자차트와 영상시스템의 등장으로 많은 잡일을 컴퓨터에 빼앗겨 버려 ‘요즘 인턴은 대체 뭐 하니?’ 이런 시어머니들의 시샘과 눈총을 받아온 지 수년, 이제 그 화려한 전설들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곧 사라진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의료계의 자정 선언이다. 최근 의사협회와 의학회는 의약품 리베이트에 관한 공식 입장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의사들의 리베이트 단절 선언이었으며, 아울러 업계의 쇄신과 정부의 제도적 뒷받침에 대한 촉구도 담겨 있다. 진작 했어야 할 것을 이제야 했다는 지적도 있고, 하의상달이 아니라 상의하달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사회적 요구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취한 회심의 조처였을 것이다. 괄목할 점은 의대 교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의학회가 동참했다는 것이다. 의대 교수들은 의료계 기득권의 핵심이면서도 그동안 짐짓 내 일이 아닌 듯 뒷짐 지고 물러서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왔다. 고무적이다.
1891년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시작하는 회칙을 발표한다. 당시 세계는 중세적 봉건 경제 체제가 무너지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대립하는 혼란스런 시대였다. 이때 종교인들이 주목한 새로운 사태란 다름 아닌 그 틈바구니에서 더욱 비참해진 노동자들의 처지였다. ‘노동조건에 관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회칙은 사회정의에 관해 교회가 처음으로 견해를 밝힌 것으로, 이후 여러 사람들과 집단의 행보에 큰 지침이 되었다.
2013년 의료인이 주목해야 할 새로운 사태는 무엇일까? 넘치는 정보와 난무하는 의료 광풍 속에서 사람들은 큰 혼란과 불안에 내몰려 있다. 환자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은 기적 같은 치료가 아니라, 함께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고 전문가적 의견을 솔직하게 제시해주는 사람답고 믿을만한 의사다. 의사의 존재 이유는 애초부터 ‘환자’에게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의사는 환자의 편이 되어야 한다. 환자를 외면하면 환자에게서 외면당한다. 신뢰를 잃고 외면당한 의사는 설 곳이 없어질 것이다. 생즉사 사즉생, 가지려고 하면 잃을 것이고 놓으면 얻을 것이다. 의료계의 새로운 질서 개편은 의사도 아니고 기업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고, 바로 환자를 중심에 놓고 고민되어야 한다.
앞서 두 가지 뉴스는 언뜻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맥락상 의사 사회의 한 가지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의사들이 수년간 부대껴온 그 정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과 ‘변해야 한다’는 각성이다. 인턴제 폐지를 골자로 한 의사 양성 제도의 개혁과 의료계 리베이트 단절 및 자정에 관한 선언은 분명 변화를 예고한다. 단순히 이름만 바꿔 쓰고 생색내는 고식적 제스처가 아니라, 진정한 의료계 질서 재편의 신호탄이 되어 주길 바란다.
김현정 정형외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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