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04 19:20
수정 : 2013.03.0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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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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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여야는 공히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다. 원천적으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은 좋게 말해서 무책임한 포퓰리즘이고, 심하게 말하면 선거용 사기극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거듭된 공약이행 다짐에도 불구하고 복지공약은 대폭 수정되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국정과제에서 ‘4대 중증질환 국가 100% 보장’ 공약은 ‘필수 의료’로 지원 범위를 제한하기로 했고, 저소득층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사회보험료를 100% 지원하겠다던 약속은 50%로 반토막이 났다. 65살 이상 모든 노인에게 지급하겠다던 기초노령연금도 지급액이 축소되었다. 아직도 재원마련 계획은 불투명하고, 그래서 수정된 복지공약마저 제대로 지켜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확대를 누차 강조했는데, 이는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할 증세의 방법이다. 지하경제 양성화는 세수확대 효과는 차치하고서라도 경제의 투명화와 조세정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외에 재산과 소득을 빼돌리는 역외탈세 문제는 정부가 특히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다.
작년 여름,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비정부기구(NGO) ‘조세정의네트워크’가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해외은닉재산을 추정한 보고서를 발간한 적이 있다. 이 보고서는 조세피난처에 은닉한 한국인의 재산이 7790억달러에 이르며,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해외재산도피 국가라고 추정하였다. 해외재산도피는 박정희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특히 아이엠에프 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규모로 발생했다. 또한 해외로 몰래 빠져나간 일부 자금은 소위 ‘검은 머리 외국자본’으로 다시 국내에 들어와서 각종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만약 이 단체의 추정치가 사실이라면 해외은닉자산은 매우 중요한 세원이 될 수 있다. 7790억달러에 이르는 자산이 연 3%의 수익을 거둔다고 가정하고, 이 소득에 35%의 소득세를 부과하면 대략 80억달러의 세수증가가 가능하다. 매년 세수가 8.5조원 정도 늘어난다면 복지재원 마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2009년부터 국세청은 국제거래를 이용한 탈세 차단을 중점 세정추진과제로 설정하였고, 약간의 성과도 거두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제도가 미비하여 거대한 역외탈세의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정부는 개인과 법인이 해외에 개설된 계좌 내역을 신고하도록 하는 해외계좌 신고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나 규정이 느슨해 사실상 신고 회피를 규제할 방법이 없다. 또한 신고 대상 법인에 역외탈세에 활용되는 금융투자회사·금융지주회사 등을 제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통상적인 기업거래로 위장해 이루어지는 자금세탁에 대해서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해외은닉재산의 적발과 역외탈세 방지를 위해서는 미국의 ‘조세피난처 남용 금지법’과 같은 강력한 법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전문성을 갖춘 국제조사인력을 확충할 필요도 있다. 국제공조도 매우 중요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조세피난처 문제에 미온적이던 선진국들이 재정위기 탓에 태도가 바뀌고 있다.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였다”고 말했던 박근혜 대통령이다. 재원문제 때문에 복지공약이 후퇴하는 사태가 반복되면 안 된다. 이제라도 정부는 증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부자증세를 실시하고, 추후에 보편증세를 추진해야 한다. 지하경제 양성화와 부자증세의 교집합에 있는 해외은닉재산의 적발과 역외탈세 방지, 박근혜 정부의 최우선 과제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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