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27 19:22
수정 : 2013.03.27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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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한양대 교수·민교협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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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인 26일 봄빛이 완연한 서울대 교정에서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본관 앞에서 희망버스 기획단과 종교인, 법조인, 예술인, 시민단체 활동가, 노동자, 그리고 교수와 학생들이 한 노교수의 명예교수 심의 배제를 규탄하고 이의 추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광장도, 거리도 아닌 교정에서 노동자들이 참여하여 기자회견을 한 것도 그렇거니와, 그 주제가 명예교수란 것도 기이하다. 15년에서 20년을 재직했으면 자동으로 추대하는 것이 명예교수 제도가 아니던가.
대학의 관계자는 재직 기간에 징계를 받은 경우 명예교수 추대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조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 사유가 실로 가관이다. 서울대 정치학과의 김세균 교수는 희망버스를 탔다는 이유로 벌금 1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고, 교과부는 이를 빌미로 삼아 견책 징계를 하였으며, 대학당국은 명예교수 심의를 배제한 것이다. 이에 희망버스의 주체들이 서울대까지 달려온 것이다.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를 살리자는 자발적 사회연대운동이었다. 민교협 또한 내부 토론회에서 이를 논의한 뒤 연대하기로 결정하고 적극 참여하였다. 1차에서 5차에 이르기까지 10여명 안팎의 민교협 교수들이 희망버스를 탔고, 3차례에 걸친 토론회를 하고 여기에 환노위 소속 국회의원을 불러 청문회를 여는 데 기여하였다. 희망버스 기획단의 회의에 참여하여 운동을 평가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는 데 참여하였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성명서와 기자회견문을 발표하고, 릴레이 기고, 세계 석학 연대 지지선언, 관련 소책자 발간(‘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및 희망버스와 관련된 5가지 쟁점 Q&A’) 등을 통하여 담론 투쟁을 선도함은 물론이고, 1인시위, 릴레이 단식 등 몸으로 하는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중심에 김세균 교수가 있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희망버스에 개근하였고 참여한 교수들의 좌장 구실을 하였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조직을 결성하여 군부독재와 맞서 싸웠고 형인 김진균 교수와 함께 민교협 창립을 주도하였다. 언제나 선봉에 서서 노동자의 관점에서 기존 체제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체제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대학교수마저 신자유주의 시장체제에 포섭당한 이 시대에 한결같이 변혁을 꿈꾸고 늘 현장에 서 있었던 한국 지식인의 사표(師表)다.
신군부의 한 핵심 인사는 원래 정권을 잡을 생각까지는 없이 교수들을 가장 두려워하여 찔러봤는데, 의외로 저항이 없어서 끝까지 간 것이라고 고백했다. 나치 또한 언론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대학을 장악한 뒤 파시즘 체제의 본색을 드러냈다. 다른 모든 곳이 무너지고 타락하였어도 지식인만 올바로 맞섰으면, 전두환 정권이나 나치 체제는 존재하지 못하였다. 지식인은 과거의 성찰과 지혜를 통해 현재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자이기에, 성찰과 비판과 비전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기에 지식인이 침묵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이런 사유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지식인의 실천을 중요시하였다. 유가에서는 지행합일을, 불가에서는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사수(聞思修)를 강조하였으며, 서양에서도 소크라테스가 게으른 말(국가)을 깨우는 등에(지식인)가 필요함을 역설한 이래 사상과 이념은 변해도 지식인의 실천을 당연한 덕목으로 삼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지식인의 사회실천은 진영의 논리가 아니다. 타락의 극점에 이른 지금이야말로 지식인의 올바른 시대정신에 입각한 비판과 실천이 절실하다. 참지식인을 버리는 곳에서는 인간도, 진리도, 미래도 버림을 명심하라.
이도흠 한양대 교수·민교협 상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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