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11 19:04
수정 : 2013.04.1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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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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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초년생이던 시절, <우리교육>에서 주최한 ‘교사 아카데미’를 수강한 적이 있다. 아이들을 ‘장악’하는 데 무능하다는 윗사람들의 평판과, 담임을 호구로 아는 아이들의 틈바구니에서 퍽 괴롭던 시절이었다. 학급운영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어느 강사의 강의를 듣다가 나는 강의장을 나오고 말았다. 학급을 얼마나 일사불란하게 잘 이끄는지, 아이들에게 또 얼마나 헌신적인지, 나는 절대로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열패감으로 질려버렸다. 그리고 열패감의 언저리에서 나는 그 학급이 혹시 ‘민주주의’의 이름을 단 작은 왕국은 아닌지, 교사의 선의와 열정은 과연 교육적으로 좋은 결과만을 낳는 것인지를 또한 생각했다.
플라톤 시절부터 지금까지 민주주의란 온갖 주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그래서 시끄럽고 더딘 체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므로 독재를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잘 없지만, 내심 민주주의보다는 독재적 카리스마를 그리워한다. 민주주의는 한 바가지의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한 걸음씩 전진하지만, 퇴행은 아주 재발라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진자운동처럼 언제나 반복되기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버려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면, 이 사회가 전진해서 도착해야 할 최종의 푯대가 있는 것도 아니라면, 남은 것이란 좋은 삶, 좋은 세상의 모습을 자기 당대의 어느 시점에 비록 짧은 시간일지라도 구현하는 것이리라. 그 과정은 무수한 시행착오와 갈등의 소용돌이를 피해갈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수한 타자성을 체험한다. 거기서 얻게 될 어떤 깨달음의 기쁨을 위해, 함께 이 세상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는 뿌듯한 연대감을 얻기 위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최고위급 직책 대부분이 고시 출신으로 채워진 대목이 퍽 우려스럽다. 모든 공부는 설령 그것이 고시를 위한 학습노동일지라도, 현실과 동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배움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배움도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이 ‘축적’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주도학습의 끝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는 문화학자 엄기호의 날카로운 진단은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주제어가 될 것이라고 본다. 칩거에 가까운, 독방에서 홀로 의사결정을 하고 수첩이라는 자신과의 소통 수단에만 의존하는 최고권력자와 그에게 순한 짐승처럼 엎드린 고시 출신 장차관들로 채워진, 이른바 히키코모리 정권. 타자성을 체험할 기회를 박탈당한 불행한 성장과정을 거쳤고, 그래서 남의 말을 좀처럼 듣지 않으며, 귀를 거스르는 충언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히키코모리형 지도자, 홀로 공부하여 성공했고, 지금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 없이 단 한 사람의 말만 들으면 되는 히키코모리형 관료들로 채워진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 두렵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기실, 우리는 서로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다. 간디의 위대성은 영국의 식민통치가 만든 것이며, 일진은 셔틀에게 의존한다. 새누리당의 평온은 민주당의 무기력에, 정치인 안철수의 부상은 정치혐오의 정서에 크게 기대고 있다. 타자성을 체험하지 못한 그 어떤 교육도, 타자성을 부정하는 그 어떤 정치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회에, 그리고 이 정권에 필요한 것은 무수한 말, 무수한 토론, 수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이며, 거기서 얻게 될 타자성의 체험이다. 나라 망하게 하자는 소리냐고? 걱정하지 마시라. 세상은 지배자들의 탐욕과 사치로 망했으면 망했지, 민주주의를 향한 분출과 혼란의 소용돌이 때문에 망했던 적은 없으니깐.
이계삼 <오늘의 교육>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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