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16 19:01
수정 : 2013.04.16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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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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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긴장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겉으론 평온해 보이지만 사람들 사이엔 불안감이 퍼져 있다. 사람들의 불안은 어떤 임박한 전쟁 때문이 아니라, 전쟁의 위험이 얼마나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이 상황의 핵심은 ‘리스크’다. 리스크는 위험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불확실한 상황이다. 위험이 있다는 가정하에 행동해야 할지, 없다는 가정하에 행동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예방하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 리스크 평가의 기본 도식을 빌리자면 R=P×S, 곧 리스크의 크기는 위험의 개연성(Probability)과 강도(Severity)를 곱한 값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의 개연성은 높지 않되, 만약 발발한다면 그 결과는 재앙이다. 또한 리스크 관리의 기본 명제가 여기에 적용된다. 위험이 없다는 가정하에 대응할수록 현실의 위험은 그만큼 더 커진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현재 한반도에선 외교적 게임과 군사적 대치라는 두 가지 구분되는 상호작용이 중첩되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중 어느 쪽을 보느냐에 따라 위험에 대한 진단이 달라진다. 외교적 밀당으로만 본다면, 남북한과 미국, 중국 등 관련국 모두 나름의 계산하에 공을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 한반도는 고압가스가 가득 찬 밀실과 같다. 오해, 오판, 만용으로 인한 작은 우연적 촉발요인만으로도 급속도의 에스컬레이션이 가능하다.
이 상황을 순전히 외교적 게임으로만 보면 실제적인 위험을 간과할 수 있다. 한반도의 전쟁은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전쟁의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 역사학자 존 키건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 이렇게 썼다. “진정한 질문은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이렇게 재앙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느냐다.” 역사상 어떤 전쟁도 끔찍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은 북한의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는데, 그 전쟁불사론은 실은 전쟁불감과 동전의 양면이다. 남북관계를 끝없이 악화시켜도 북한은 전쟁하지 못할 것이고, 오직 붕괴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쟁불감은 대북 화해협력의 죽음을 뜻했다. 위험이 없다고 믿는 자에게 왜 평화가 중요하겠는가?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전쟁불감 정책이 상당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다는 데 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인 2월20일의 한국갤럽 조사에서 ‘대북 지원 전면중단’에 찬성한 비율이 60살 이상(57%)에서 가장 높았다. 흥미롭게도 4월8~9일에 실시한 조사에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한 응답자가 60살 이상(18%)에서 가장 적었다. 전쟁이 비현실적이라 믿기 때문에 북한과의 갈등 격화에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성큼 다가온다. 전쟁의 야성을 다스리고 정치의 이성을 발휘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새 구상을 내놓기도 전에 큰 시험에 들었다. 이것은 전쟁수행 능력이 아니라, 전쟁 예방과 갈등 해결의 능력을 묻는 시험대다. 군사적 대치를 뒤로 물리고 외교적 현안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정치력이 요구된다. 그러고 나서 북핵과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한 의제를 본격적으로 다뤄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그것을 해낸다면, 이명박 정부가 내다버린 외교적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는 큰 성과가 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구상하는 새로운 한반도는 거기서, 오직 거기에서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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