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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30 19:04 수정 : 2013.05.30 20:56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정부는 신뢰 프로세스를 말한다. 그러나 남북관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불신 프로세스다. 신뢰의 말과 불신의 현실, 이 충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곧 100일이 된다. 이명박 정부와 다를 것이라는 약간의 기대감은 근거가 없음이 드러났다.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래도 정부가 신뢰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신뢰에 무조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도 적대와 대립의 관계에서 말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지 국제정치를 바라보는 현실인식은 아니다. 배신의 위험이 없다면 신뢰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관계에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관계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신뢰다.

신뢰는 평화를 만들고 협력을 확대하는 데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신뢰가 없이는 협력의 과정을 지속하기 어렵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협력의 과정 없이 신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특히 협력 수준이 낮으면 신뢰는 깨지기 쉽다. 불신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뢰 형성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신뢰를 대화의 결과가 아니라 대화의 조건으로 생각한다. 정부 관계자들은 북한과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믿어야 대화할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고, 동시에 역사적 근거도 없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부가 7·4 공동성명을 채택할 때 과연 북한을 신뢰했을까? 아니다. 냉전시대 미-소 관계나 분쟁 해결을 위한 다양한 대화와 협상에서 신뢰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적이 있는가?

적대적인 관계에서 상대의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거래나 협상은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위험 관리를 하면서 공통의 이익을 넓혀가는 것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말했다. “믿어라. 그리고 검증하라.” 북한의 6자회담 참여 언급이나, 혹은 개성공단에 대한 입장은 언제든지 접촉의 과정에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약속의 이행 과정에서 충분히 검증할 수 있다.

불신의 근거로 지금까지 북한의 행태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합의의 파기나 관계의 악화를 과연 일방의 책임으로 볼 수 있을까? 책임의 비중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상호 관계 속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불신을 근거로 삼아 대화에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갈등 해결의 과정이 시작될까? 묻고 싶다. 동서독 관계, 동서의 데탕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랜 시간 풀기 어려운 분쟁들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 보수정부든 진보정부든 현안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잘못된 이념과 근거도 없는 허상에 사로잡힌다면 결국 남는 것은 무능뿐이다. 무능이 아픈 것은 기회의 상실 때문이다. ‘잃어버린 기회’들이 늘어만 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뢰는 대화의 결과지 대화의 조건이 아니다. 신뢰 형성이 그래서 중요하다. 신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정책의 예측가능성이 가장 중요하다. 현 정부의 정책결정이 공적인 과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사적 개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해당 부처의 실무적 의견이 중시되지 않고, 부처간 협의와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다 불쑥 대통령이 개입해서 결정을 내린다. 혼선이 불가피하고, 해당 부처는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정부 안의 관료들도 예측하기 어려운 정책을 신뢰가 없는 상대가 믿을 수 있을까? 북한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할 때 스스로의 신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기를 바랄 뿐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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