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02 19:19
수정 : 2013.06.02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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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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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맛깔스럽게 잘하는 정치인이 노회찬이다. 그는 참 쉬운 단어로 간명한 논법을 사용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방편설법이 연상될 정도로 듣는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다. 최근 방송에 나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달인 수준이다.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말간 얼굴의 현학적 논리보다 촌티 나는 노회찬의 진솔한 서민어법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그는 말 잘하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신뢰 가는 정치인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 노회찬은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느낄 정도로 억울한 박탈이다. 얼마나 분하고, 또 얼마나 속이 아리랴. 여기에 더해진 재보궐선거에서의 속수무책 패배까지…, 어지간한 사람이면 견디기 힘든 고통이고 시련이다. 그런 그가 멘붕은 사치라면서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섰다. 야권의 개편에 나름의 구상을 제시하며 안 그래도 지지부진하던 차에 안철수 의원의 등장으로 관심권에서 멀어지던 진보세력의 존재감을 살려내고 있다. 사실 노회찬을 제외하면 진보 정치권의 그 누구도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노회찬에게는 특유의 서민어법뿐만 아니라 정국의 흐름을 읽고 적절한 구상을 제시하는 경세가로서의 면모도 있다. 노회찬은 좋은 정치인이다.
그런데 지금 노회찬이 직면하고 있는 세상은 현재의 처지에서 개인 내공으로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아예 판을 바꿔야 한다. 이대로 가면, 설사 당명을 바꾼다고 해도 진보정의당이 다음 총선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중적 신망을 거의 잃은 통합진보당에 비해 조금 형편이 낫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오십보백보다. 따라서 노회찬은 진보세력의 회생을 위해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던지는 순교다.
2011년 노회찬·심상정 그룹은 민주당이 아니라 유시민·민주노동당을 통합의 파트너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총선 뒤 파탄으로 끝났다. 2013년 민주당과 안철수 세력 간의 치열한 경쟁이 야권 재편의 기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국 운영이나 야권 재편의 독자적 동력을 잃고 기신기신하던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정의당 등으로선 불길한 흐름이다. 자칫 진보 정치권 전체가 주변화될 수 있다. 게다가 ‘안철수 신당’이 노동 중심성을 가질 것이란 주장이 나오면서 진보정당은 그 존재 이유마저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진보 정치권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진보정의당이 야권 재편의 기폭제가 될 수 있는 틈이 열렸다. 진보정의당이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야권의 재편 방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정의당이 민주당을 선택해 당내 진보블록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노동을 매개로 안철수 세력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에 매진할 수도 있다.
노회찬은 지금 초라한 빈손이다. 하지만 그 초라함 때문에 이제 누구도 그를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지난 재보궐선거의 사감을 털고, 정치인에게 고유한 자기 부양(self promotion) 습성을 버린다면 더더욱 그의 역할은 커질 것이다. 노회찬의 역할은 이제 리더가 아니라 조정자여야 한다. 차이와 갈등 속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되,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이어야 한다. 답습하면 망한다. 주저해도 망한다. 독립노동당을 이끌고 영국 노동당의 창당에 참여한 연대의 상징 키어 하디처럼 노회찬이 집권 가능한 진보적 대중정당을 만드는 데에 산파 구실을 하면 좋겠다. 말은 넘치나 도통 실행은 없는 다변무행의 야권, 이 야권 재편의 시작은 부득불 노회찬의 순교적 선택이지 않을까 싶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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