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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3 19:11 수정 : 2013.06.03 19:11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피해자의 윗니를 서너 개 부러뜨리는 등 온몸을 심하게 때려 결국 장기 손상으로 사망케 했다. 그는 피해자를 만났던 클럽을 태연하게 다시 찾아 또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악인이 아닐까.

전형적인 악인은 종교, 동화, 민담, 공포영화, 무협지, 슈퍼히어로 만화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사탄, 루시퍼, 드라큘라 백작, 한니발 렉터, 조커, 아수라 백작, 다스 베이더다. 그들은 검은 옷을 즐겨 입고, 구레나룻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고,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신이 나서 낄낄댄다. 종종 돈과 권력을 밝히긴 하지만, 진정으로 추구하는 목표는 죄 없는 피해자들을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히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세계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은 허구의 세계를 휘젓는 악인과 한참 거리가 멀다.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그의 저서 <악>에서 순수한 악은 신화에 불과하며, 현실세계의 악인은 대개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임을 보였다. 현실의 악인들은 자기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며, 결코 나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스스로 굳게 믿는다. 바우마이스터의 이론은 아프게 다가온다.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 광주 민주화 항쟁을 유혈진압한 전두환, 대구 여대생을 살해한 범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아니라 자기가 보기엔 필요하거나, 심지어 올바른 일을 행한 보통사람들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가 남을 괴롭히는 데서 기쁨을 얻는 미치광이라고 몰아세운다. 반면에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작은 손실을 끼쳤을 따름이며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라면 마찬가지로 행동했을 것이라 항변한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바우마이스터는 한 대학생이 친구가 듣는 수업의 보고서 작성을 도와준다 약속하고서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결국 친구가 그 수업에서 최저 학점을 받게 된 과정을 상세히 담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읽도록 했다. 첫째 집단은 가해자가 되었다고 상상한 후 가해자의 시점에서 그 이야기를 상기해서 백지에 다시 썼다. 둘째 집단은 피해자의 시점에서, 셋째 집단은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회상하여 썼다.

실험 결과는 사뭇 놀라웠다. 객관적인 제3자의 기억에 비하여,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점에서 사건을 돌아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은 상세히 나열하고 불리한 부분은 줄이거나 아예 생략하는 식으로 사건을 왜곡하여 기억했다. 악행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는 모두 자신의 너그러움과 믿음직함을 다른 이들에게 열심히 광고하여 평판을 높이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였다. 진실은 가해자의 관점에도, 피해자의 관점에도 없다. 진실은 두 관점 사이 어딘가에 있다.

순수한 악은 현실세계엔 없다는 통찰은 종종 우리가 피해자의 처지에서 가해자를 비난할 때 부지불식간에 가해자를 악마로 만들기에 급급할 뿐, 왜 그가 그런 악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는 눈감기 쉽다는 점을 일깨운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처럼 극악한 범죄는 설명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진다. 일제는 그냥 순수한 악이었으며, 다른 그 어떤 설명도 일제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 수작일 뿐이라며 사람들은 흥분한다. 한 사건을 두고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보여주는 색안경을 쓰고 있다는 깨달음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을 성숙하게 해결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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