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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5 19:06 수정 : 2013.06.05 19:06

이범 교육평론가

박근혜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4월23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교과서를 충실히 만들어 참고서를 볼 필요 없도록 하고, 교과서 밖에서는 절대 시험이 출제되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은 밋밋하더군요. 관련된 사설이나 칼럼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좀 뜬금없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관료들로부터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여 오해하고 계신 부분이 있는 듯합니다.

중학교 성적표를 보면, 과목별로 석차가 표기됩니다. 한 학년이 300명인데 너는 몇 등, 이런 식이죠. 이 학생이 만일 특목고에 지원하면, 특목고에서 석차 상위 4%까지 1등급, 11%까지 2등급, 23%까지 3등급, 이렇게 9등급까지 내신 등급을 매겨 반영합니다. 그런데 중간·기말고사에서 모두 만점을 받은 학생의 수가 1등급 기준인 4%를 초과하면 어떻게 될까요? 5%, 6%까지는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4%의 갑절인 8%를 초과하는 순간 만점자들은 모두 2등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황당하시죠? 만점 받아도 2등급을 받게 되다니…. 만일 만점자가 8%를 넘어 모두 2등급을 받게 되면, 교사는 “너 때문에 우리 학교 학생들 특목고 가기는 글렀다”는 욕을 먹게 됩니다. 특히 학력 수준이 높은 지역일수록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지요. 교사는 만점자가 늘어날수록 공포감을 느끼게 됩니다.

교사는 자연히 시험을 어렵게 출제하게 됩니다. 만점자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죠. 그러면 학생들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학원을 더 열심히 다녀서, 그 어려운 시험문제마저 더 빨리 풀어낼 수 있도록 연습을 하고 나타납니다. 그러면 교사는 더더욱 어렵게, 심지어 교과서 구석에 있는 교육적으로 별 의미 없는 내용도 ‘이건 아무도 못 맞히겠지?’ 하며 출제하거나, 상급 학년에서 배우는 이론을 알고 있으면 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항마저 출제하는 겁니다. 이 악순환이 10년 넘게 지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강남·목동 등지의 중학교 수학·영어 시험지를 보면 난이도가 극악한 지경입니다.

제가 서울시교육청에 근무할 때 이걸 바꿔보려고 시도했는데, 특목고 내신 산출 방식이 ‘교육부 규칙’으로 지정되어 있어 이걸 어기면 담당 장학관·장학사들이 징계받을 상황이라 결국 손대지 못했습니다. 특목고 진학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제도를 만들어 놓아 학교 내신 평가가 완전히 왜곡되어버린 것입니다.

마침 작년 중1부터 석차가 없어지고 이른바 ‘성취평가제’가 도입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웬걸, 학교 시험은 재작년 이전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인 석차는 없어졌지만, 자기 점수와 평균 점수, 그리고 표준편차가 적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을 간단한 공식에 대입하면 ‘표준점수’라는 게 산출됩니다. 표준점수란 평균과의 격차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대평가 지표인데, 교사들은 내신성적을 ‘표준점수’로 반영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변별력이 강제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성취도’ 측정이고, 성취도의 기준은 국가 교육과정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 부산물로 ‘변별력’이라는 게 생깁니다. 그런데 지금 주객이 전도되어 ‘변별력’이 최우선시됩니다. 관료들은 심지어 실상을 제대로 모를 수도 있습니다. 평가 담당, 특목고 담당, 교육과정(교과서) 담당이 따로 놀거든요. 학생·학부모의 고통은 여기서 발생합니다. 이것부터 바꾸십시오. 불합리한 내신 평가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교과서를 충실하게 개정하고 교과서에서만 출제하라고 명령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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