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15 18:42
수정 : 2013.07.1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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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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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상태에서 4년 만에 깨어난 한 여인의 잔혹한 복수극을 담은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의 첫머리에 나오는 자막은 이렇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어야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저녁 파티에 쓸 치즈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으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이 왠지 연상되는 경구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도 “복수는 달콤하다”고 했다. 복수심은 남에게 당한 손실을 고스란히 되갚아주라고 우리의 등을 떠민다. 그리고 보복은 보복을 불러 결국엔 모두 멸망하게 된다. 왜 이렇게 파괴적인 충동이 종종 우리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걸까? 복수가 굳이 달콤해야 할 까닭은 무엇일까?
복수의 모든 단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새콤달콤하지는 않다. 누군가 나에게 의도적으로 꿀밤을 한 대 먹였다고 하자. 이때 우리의 뇌에선 괴로움, 분노, 혐오를 담당하는 부위가 활성화되며 상대에게 즉시 반격하게 된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단계는 전혀 즐겁지 않다. 짜증과 화만 솟구쳐 오를 뿐이다. 하지만 잊지 마시라. 복수는 뜨거울 때 먹으면 맛이 없는 음식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의 도발에 바로 맞받아치는 분노 표출 단계는 원수를 갚는다는 목표를 꾸준히 추구하는 단계로 이행한다. 이때 우리의 뇌에서는 초콜릿, 마약, 혹은 로또 1등을 상상할 때 쾌감을 얻게 해주는 부위가 새로이 활성화되어 쾌감을 맛보게 된다. 복수를 계획, 실행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에 마침내 원수를 갚는 상황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것만으로도 쾌감을 얻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복수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원한 콜라를 마음껏 들이켜는 모습을 상상하면 고된 유격훈련을 쉽게 견딜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제 왜 우리가 이토록 복수에 집착하게끔 진화했는지 알아보자. 오늘 저녁도 복수를 주제로 하는 드라마들이 복수를 달콤하게 여기는 시청자들을 유혹하려 애쓸 테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복수는 헛되고 무익하다. 엎질러진 우유는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가족을 죽인 원수를 기어이 살해한다고 해서 고인이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 공멸할 뿐이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복수심은 상대방의 공격을 사전에 억제한다는 뚜렷한 기능을 수행하고자 진화했다고 주장했다. 나를 두 번 다시 건드리지 않게 하려면 상대로 하여금 앞으로 그 어떠한 도발도 털끝만한 이득조차 가져다주지 못할 것임을 똑똑히 각인시켜야만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빚진 만큼 똑같이 되갚아줘서 상대방의 순이익이 언제나 영이 되게 해야 한다. 복수심이 상대의 선제공격을 미리 억제하기 위해 대단히 소모적으로, 때론 자신까지 파멸로 이끌게끔 진화했다는 이 설명은 진화 게임 이론가들이 행한 수많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로 뒷받침되었다.
복수심이 자연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적응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사적 처벌은 엄격히 금지된다. 국가가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독점하는 문명사회는 무자비한 복수가 난무했던, 우리가 진화했던 과거 환경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다. 그러나 정의의 실현을 국가에 맡기게 되면서 종종 우리는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들이 복수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다는 당연한 사실마저 무시하곤 한다. 사적 처벌은 물론 금지해야 하지만, 복수심에 몸부림치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노력은 오히려 적극 장려해야 한다. 복수라는 파괴적인 충동은 비정상적인 질병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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