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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22 18:59 수정 : 2013.07.22 18:59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 사장 출신이자 공화당 성향의 40대 맥나마라를 전격적으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국방과 전쟁 수행이 군사전략보다는 미국 자본주의, 특히 군산복합체의 운영과 직접 연결되었기 때문에 군 출신보다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가가 국방부 운영에 더 적임자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미국과 영국·독일 등 선진국의 국방부 장관은 주로 민간 출신들로 채워졌다. 군 엘리트는 역시 전쟁 상황에서 그 용기와 지혜가 빛나는 법이지만, 전쟁 수행 그 자체도 최종의 전략적 판단은 군인이 아니라 정치가들이 내린다. 국가의 이해가 첨예하게 맞서는 국제정치에서는 ‘적과 나’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전투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군 출신이 정치를 하거나 국가를 이끌 수 없다는 점은 오래전에 이미 결론이 내려진 사안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목표가 변했고, 그에 따라 냉전시절 통용되던 한국의 안보와 국방의 개념도 변화를 요청받은 지 오래다. 검찰 조사에서 나타난 전두환 일가의 모습이야말로 정치군인들이 언제나 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얼마나 ‘자기 이익’에 목숨을 건 인간들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물증이다.

그런데 옛 생각을 그대로 간직한 전두환의 후배들이 20여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국정원의 국가기밀 공개, 개성공단 협상에서의 초강경 노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연기 제의 등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 터져 나온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북한을 밀어붙이고 국민의 ‘군기를 잡고’ 미국에 납작 ‘엎드리면’ 국가안보가 지켜진다고 생각하던 냉전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적과 나’의 구분이 모호해지거나 ‘적’과 화해를 하게 되면 군의 필요성이 약해지고, 그것은 그들의 ‘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렇게 대북 적대 시절로 돌아가려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은 물론이고 대통령 국가안보실장, 국정원장 등 외교안보 라인의 요직을 모두 육사 출신 선후배 기수의 군 출신으로 임명했을 때 이 정부가 대북 초강경 노선을 걸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고되었고, 이들이 지금의 복잡한 외교안보 문제를 헤쳐나가기에는 적임자들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청년기에 단순한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만 주입받은 뒤 자유롭게 비판적 학습의 기회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을 군 원로들이 안보, 국가정보, 대북·대미 관계, 나아가 국가 운명을 좌우할 그런 세상이 아니다, 지금은. 더구나 상명하복, 인명경시, 성과주의 등 제국주의 일본군의 나쁜 전통과 친일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을뿐더러 한국전쟁기나 베트남전쟁기 민간인 학살, 각종 무기 도입 비리, 천안함 사태 당시 경계 실패 등 치명적인 과오를 저지르고도 그 환부를 칼로 도려낸 적이 없고, 반성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한국의 군부와 군 지휘관들이 아닌가?

21세기 한반도가 처한 안보·국제질서에서 ‘독일 병정’이나 ‘충성이 몸에 밴’ 군 지휘관은 더는 필요하지 않고, 20세기 세계사와 냉전사, 중국의 변화를 잘 학습하고 미-중 패권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새로운 안보 개념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재무장에 대비할 수 있는 국방력을 갖추는 일을 고민하는 군 엘리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이렇게 판을 짠 당사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아닌가? 대통령이 이들의 시대착오적 국익관과 안보관을 가장 신뢰할뿐더러, 이들 위에 서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다면 장차 우리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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