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30 18:37
수정 : 2013.07.30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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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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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있었던 국가직 9급 공무원 시험에 20만명이 넘는 청년들이 지원했다. 지난해 15만여명이 지원했는데 단숨에 30%나 늘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 많은 지원자들 마음속에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읽혀서다.
그 와중에 미래창조과학부는 과학영재고와 마이스터고에 기업가정신 과목을 개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아마도 한국 재벌 1세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려는 모양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에서 늘 주장하던 내용이다. 전공 지식이 부족한 몇몇 언론인들은 경제민주화가 기업들을 위축시키고 그 결과로 기업가정신이 약화된다는 인상비평을 늘어놓는다. 그 와중에 정부 고위관료들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경제민주화를 그만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고 있다.
이들의 ‘기업가정신’에 대한 이해는 얕아도 너무나 얕으니 어쩔 수 없이 원론을 이야기해야겠다. 기업가정신이란 원래 위험을 감수하며 일을 만들고 키우는 정신을 뜻한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가정신을 “변화를 찾고 변화를 기회로 바꾸는 정신”이라고 했다. 돈을 버는 영리한 방법을 찾는 정신이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바꿔보겠다며 자신이 가진 것을 걸 수 있는 정신이다. 드러커는 그래서 특히 사회변화를 꿈꾸는 비영리 영역에서도 기업가정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려면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당연히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는 체계를 세워야 한다. 실패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떤 안전망을 갖추고 있는가. 패자에 대해 우리 사회는 어떤 시선을 보이고 있는가. 정책적 고민은 이런 곳에 집중되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가득 찬 사회에서 호통만 친다고 청년들이 위험을 감수하겠는가? 창업해서 조금이라도 성공할라치면 임대료는 치솟고 재벌 계열 경쟁사가 같은 아이템으로 바로 옆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원청 대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핵심 인력 데려가고 똑같은 제품 만들어 시장에 내놓을 수 있으니 기술이 있어도 막막하다.
더 큰 문제는 실패했을 때다. 이제 편의점 알바로 돌아가 최저생계비로 살아야 한다. 어영부영 35살, 40살이 넘어가면 그나마 정부가 마련한 청년지원프로그램도 완전히 졸업이다. 얼마 전 나왔던 편의점 주인 자살 뉴스, 비정규직 청소·경비 노동자들의 대량해고 뉴스가 귓가에 맴돈다.
이런 상황에서 교과서에 성공한 재벌 몇 명의 이야기를 싣고 청소년들에게 모든 위험을 짊어지라고 윽박지르는 게 기업가정신을 북돋우는 방법인가?
그나저나 교과서에 실으려는 그 재벌 가족들 중 상당수는 이미 기업가정신에서 멀리 벗어난 지 오래다. 자녀에게 꽃집과 빵집을 차려주고 자기 기업의 일감을 몰아주고 편하게 돈을 벌며 회사를 물려받는 작업에 온 정신을 쏟은 지 한참 됐다. 한편 그렇게 모은 재산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주로 활용되는 조세도피지역의 해외계좌에서 발견되곤 한다. 기업가정신의 본령인 ‘모험’은 온데간데없다.
정말로 기업가정신에 관심이 있다면 할 일은 따로 있다. 청년들이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회 약자가 강자를 이기기도 하는 곳이고, 실패해도 보호하고 격려해주기도 하는 곳이고, 사람을 소속사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능력과 가치로 평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사람들은 가진 것을 걸고 일을 한다. 이런 믿음을 키워줄 수 있도록 시장의 공정성과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 가야 한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뒷전으로 미룬 채 기업가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다리도 안전장치도 없는 벼랑 끝에서 아이들에게 달리라고 호통친다고 달리기 시합이 되겠는가?
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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