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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6 19:00 수정 : 2013.08.06 19:00

정정훈 변호사

최근 종영한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역설적이다. 제목처럼 드라마의 주된 내용은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초능력을 가진 수하(이종석)의 이야기다. 그러나 드라마는 정작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었던 사람들, 민준국(정웅인), 황달중(김병옥), 치매 독거노인과 어린 소년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던 판사·의사·기자와 이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법정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이지만, 사건의 시작은 의료현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준국의 아내가 심장이식수술을 받다 사망하자, 민준국은 의료사고로 죽은 ‘아내를 살려내라’고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다 구속된다. 아마도 민준국이 구속 수감된 사이에 그의 노모(치매 독거노인)와 나이 어린 아들이 생활고로 죽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복수극이 시작된 배경이다. 이 복수극은 법정이라는 공간을 통해 화해로 끝을 맺는다.

흔히들 변호사는 말(言) 잘하는 직업이라고 한다. 변호사의 변(辯)은 ‘말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에서는 달걀을 풀고 설탕과 바닐라 등을 섞어 제조한 전통술이 있는데 이를 ‘아드보카트’(Advocaat)라고 한다. 술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네덜란드어로 ‘아드보카트’가 변호사를 의미하고, 이 술을 마시면 말주변이 없는 사람도 청산유수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변호사는 말을 ‘하는’ 직업이기 이전에 말을 ‘듣는’ 직업이라는 것이다. 의뢰인의 말을 세심히 듣고, 그 이야기를 법률 용어로 전환해서 드러내는 것이 변호사의 역할이다. 판사도 마찬가지다. 판사는 법정에서 성의를 다해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법관과 소송관계인 간의 의사소통이 재판의 본질이다.

드라마에서 차관우(윤상현)는 이러한 변호사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피고인 주변에 한 번이라도 피고인의 외침을 들었더라면 어땠을까요? 피고인을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은 피고인 자신이 아니라 귀를 막은 우리일지 모릅니다!” 그의 변론은 이 드라마의 주제 의식을 깊숙이 드러낸다. 속물 변호사 장혜성(이보영)도 수하와 차관우를 통해 의뢰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쳐 간다.

의사라는 말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한자 ‘의’(醫)가 ‘앓는 소리 예’(

)자를 포함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의사도 환자를 치료하기 이전에 환자의 이야기를 세심히 듣고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30분 대기, 3분 진료’의 우리 의료계 현실이나, 내과의사가 환자와 면담을 시작한 이후 평균 18초 안에 환자의 말을 가로막는다는 외국의 보고서는 이러한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다. 정확하게는 ‘듣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재판도, 치료도, 그리고 용서와 화해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근거 없는 권위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외면할 때 ‘억울한 옥살이’가 시작되고, 의료사고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치명적 복수극의 씨앗이 뿌려진다. 소통의 기본은 권력을 가진 자가, 권위를 가진 자가, 책임을 지닌 자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정보(情報)가 아니라 누군가의 ‘소리’이며, ‘소리’는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드라마의 수하처럼 마음의 소리를 듣는 초능력을 갖지 못한 현실의 우리들이 새겨야 할 자세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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