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8.18 19:06
수정 : 2013.08.18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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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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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법 개정안이 논란 끝에 수정되었다. 소득세 부담 기준선이 345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상향 조정된 것이다. 이것을 두고 새누리당 최경환 원내대표는 “과정을 떠나 (중략) 상처를 드린 점 반성하고 있다”며 여당으로서 사과의 뜻을 밝혔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이 중산층에게 세 부담을 주는 세법 개정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말한 것은 다행”이라고도 했다. 나는 이와 생각이 좀 다르다. 이번 세법 개정안 논란은 결과보다 과정이 훨씬 중요하고,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여, 야, 정부, 국민 모두가 패자였음을 알 수 있다.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도, 그 지시가 있은 지 하루 만에 수정안을 제출한 기획재정부도, 모두 ‘다행’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그 과정을 다시 되짚어 보자. 시작은 지난해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었다. 복지와 재정을 동시에 지켜내는 것은 모든 선진 복지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고, 불행히도 이들 중 대부분은 이 과제에 지속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 세계적 현실이다. 이 상황에서 이제부터 복지 지출을 늘려나가야 하는 한국이 증세 없이 복지를 하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은 너무나 명백하다. 안 될 것이 뻔한 공약으로 선거를 이기고, 선거에 이긴 뒤에는 공약을 뒤집거나 후퇴시키는 일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차대한 규칙 위반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권력을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규칙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우회하는 행위를 묵인할 것인가.
새누리당은 수차례에 걸친 당정협의에서 조세 개편안 내용을 보고받고 동의했으면서도 일단 문제가 불거지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선거에는 이겼지만 여당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 국정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누가 진지하게 정책을 논의할 것인가. 새누리당과 협의해놓고 새누리당으로부터 비난받은 관료들은 역시 정치인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을 것이다. 세금폭탄론 꺼내들었다가 뭇매를 맞은 민주당은 그들이 주장했던 보편적 복지의 실현 방안을 모색하기보다는 상대방 공격에 급급하다는 강한 인상만 남겼다. 결과적으로 그 공격에 사용된 무기는 자살폭탄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아야 했다.
대통령은 이번에도 역시 논란이 되는 일에는 일체 무대응으로 일관하다가 느닷없이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고 하루 만에 그것을 관철시킴으로써 결국 이 나라의 모든 정책은 제왕적 대통령 단 한 사람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입증했다. 협의해놓고 뒤통수 맞고, 이제는 경질론에 시달리는 경제 관료들은 억울할 만도 하다. 현 경제팀이 그리 유능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간 과정을 보면 그들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모든 당사자가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관료만 물러나는 일이 반복되다 보면 관료 사회에 보신주의와 출세 지향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비판할 근거는 희박해진다.
인구학적 추계에 따르면 약 10년 뒤부터 한국 사회의 고령화에는 본격적으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할 것이다. 복지 수요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세금을 낼 경제활동인구는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그때가 되면 조세정의고 뭐고 따지는 것 자체가 사치로 느껴질 것이다. 증세는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한 문제여서 남은 시간 동안 기껏해야 서너번 정도밖에는 논의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그중 한번의 기회를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날려버렸다. 이번 세법 개정안 논란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고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되어버린 이유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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