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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26 19:10 수정 : 2013.08.26 19:10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걸그룹 크레용팝이 한 극우 인터넷 사이트와 연관되었다는 의혹에 해명하며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언급해 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 야당과 시민단체는 국정원 대선개입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몇 달 전 윤창중 사건 때 박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직접 사과하지 않고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사과해 진정성 논란이 불거진 바 있다.

잘만 하면 사과는 피해자의 복수심을 가라앉히고 용서를 이끌어내기에 효과적이다. 피해자가 복수를 접기 위한 선결조건은 가해자가 자신을 또 때리진 않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이다. 가해자가 또 때릴지도 모르는데 피해자가 먼저 무기를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뒤집어 말하면, 사과의 핵심은 더는 상대를 때릴 의도가 없음을 상대에게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다. 좋은 사과는 나의 책임을 인정하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상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피해를 보상해 주고, 다신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다짐하는 사과다.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줘서 유감이다”라는 사과는 앞으로 또 본의 아니게 해를 끼칠지 모르겠다고 약 올리는 나쁜 사과다.

문제는 사과가 말잔치로 끝나기 쉽다는 점이다. 심금을 울리는 사과성명이나 반성문이 알고 보니 난처한 상황을 모면하고자 맘에도 없이 쓴 글인 경우는 부지기수다. 다행히 우리는 말뿐인 사과와 진심이 담긴 사과를 구별하는 법을 진화시켰다. 여기 잘못을 깊게 뉘우치고 새로 태어난 가해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려면 가해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과연 자신을 또 해치려는 의도가 깨끗이 삭제되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피해자를 해칠 의도가 정말로 사라졌음을 가해자는 어떻게 알릴까? 마음이 버선목이 아니니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다.

어떤 신호를 믿을 수 있게 하려면 그 신호를 만드는 데 높은 비용이 들게 하라. 진화생물학의 주요한 원리다. 곧, 말로만 때우려는 사람은 차마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싼 신호를 가해자가 낸다면 상처받은 피해자는 가해자가 새로 태어났음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바로 자기를 낮추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영장류에서 하급자가 상급자를 달랠 때는 몸을 쭈그리고 앉고, 눈을 내리깔고, 취약한 신체 부분을 보여준다. 자신의 몸을 문자 그대로 작고 약하게 만들어서 “나는 네 밑이야. 도전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때는 굽실거리거나, 머리를 조아리거나, 무릎을 꿇는 행동을 한다. 자신을 낮추고 작게 함으로써 피해자의 지위를 원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행동을 할 때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 기관들이 동원되면 더욱 효과적이다. 이를테면 혈액 순환이나 눈물샘의 활동은 자율신경계가 관장하므로 우리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무덤덤하고 굳은 얼굴로 사과하는 것은 꾸며낼 수 있지만, 뺨이 붉어지고, 눈물을 흘리고, 말까지 더듬는 얼굴로 사과하는 것은 꾸며낼 수 없다. 의지와 상관없이,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만 경험하는 생리적 변화를 가해자에게서 본 피해자는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말뿐인 사과를 하면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받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자면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사람들이 사과를 잘 안 하려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사과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서로 협력하는 대등한 동반자 관계를 회복하는 첩경이다. 국민 통합에 앞장서야 할 대통령이 주저할 이유가 없다.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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