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08 19:10
수정 : 2013.09.08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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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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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회라면 개인들을 사회와 자연스럽게 연결해주는 끈이 존재한다.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끈은 자원적 결사체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민들이 수많은 모임과 단체를 만들고 활발히 참여하는 풀뿌리 시민사회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힘이었다. 토크빌의 이러한 관찰은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정치학의 고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자원적 결사체라는 끈은 이제는 그 매듭이 풀려나가고 있고, 이것은 미국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심각하다.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이 그것이다. 한때 미국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힘이었던 시민들의 자발적 모임은 어느덧 이리저리 흩어져서 이제는 볼링조차 혼자 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서 그 끈은 노조이다. 비록 1990년대 이후 스웨덴의 사민주의 복지국가 모델이 변화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노조를 빼고 스웨덴인의 삶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한창때에 비해 노조 가입률이 낮아져서 고민을 하고 있지만 그 낮아진 노조 가입률이 아직도 70%대다. 스웨덴의 아버지가 “아들아, 네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 직업을 가지게 되면 다른 건 몰라도 노조에는 반드시 가입해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스웨덴에서 노조는 단순히 노동자의 이익을 관철하는 조직을 넘어서 사회를 통합하는 끈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정당이 이 끈을 제공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종교가 이 끈을 제공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한국에서 개인을 사회로 연결해주는 끈은 실종된 지 오래다. 노조는 국가경쟁력 갉아먹는 훼방꾼 취급을 당하기 일쑤고, 정당은 기피대상 1순위다. 직업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이 정당에 가입했다면 주변의 수군거림은 물론이고, 본인의 직업 여하에 따라서는 처벌도 각오해야 한다. 희망의 싹을 보여주는 일부 시민단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정권의 필요에 따라 급조되고 동원되는 가짜 시민단체들의 폐해 또한 심각하다. 그래서 아무런 끈도 없는 한국인들은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5000만명의 개인들이 되어 물과 기름처럼 떠다닌다. 부유사회(浮游社會)라고나 할까. 개인과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그 빈자리를 파고드는 것이 우리끼리 나눠먹자는 온갖 학연·지연 같은 연고조직이거나 혹은 기업화된 종교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은 끈 없이 떠다니는 부유사회의 정치적 결과이기도 하다. 시민이 없는 텅 빈 정당에는 정파만 남게 되고, 그 정파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감시하고 여과할 집단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으로부터 고립된 정파는 과거의 믿음에서 더 진화하지 못한다. 문제는 다른 정당들도 아무런 끈 구실을 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과 내용은 다르지만 구조는 똑같다.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언제든 채울 수 있는 위험한 내용은 얼마든지 있다. 어디 종북뿐이랴. 극우가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있고, 지역주의, 인종주의, 군사주의, 매카시즘, 충성경쟁, 역사왜곡… 위험한 것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정치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위해 어떻게 이 텅 빈 정당을 시민들로 채워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표결에 불참했으면 종북이고, 기권하거나 반대했으면 종북이고, 스스로 종북이 아니라고 고해성사하지 않으면 종북이고, 종북에 침 뱉지 않으면 종북이라는 새누리당 일각의 주장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종북 못지않게 위험하다. 떠도는 사회의 정당이란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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