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9.12 19:01
수정 : 2013.09.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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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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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다. 제주4·3평화기념관에 들렀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인 딸들이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훌륭한 시설이었다. 외국의 평화기념관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특히 4·3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그린 애니메이션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의 경찰의 발포다. 그런데 교학사의 역사교과서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남로당 주도의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강조한다. 국가폭력이라는 비극의 본질을 무시했다. 그리고 이념갈등으로 사건의 성격을 바꿔버렸다.
이래도 되는가? 4·3 특별법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부정하는 도발이다. 심의에 관여한 정부기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4·3과 5·18, 그리고 4·19에 관한 기억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집권여당이, 그리고 정부부처가 ‘합의된 역사기억’에 이렇게 도전해도 되는가?
오류들은 왜 이렇게 많은가? 연도가 틀리고, 용어도 엉뚱하고, 사람이 바뀌고, 베낀 흔적이 수두룩하다. 1950년 애치슨 라인과 1949년의 미군 철수를 인과관계를 바꿔 설명하기도 한다. 어떻게 나중에 일어난 일이, 앞선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단지 실수일까? 그래서 시간을 주면 고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아니다.
교과서 집필자들의 태도를 보라. 그들은 이념을 들고나온다. 역사기억으로 삼을 근거가 없고, 사회적 합의도 어렵고, 그래서 교과서로 부적당하다는 지적에, 아니나 다를까 이념으로 모든 것을 덮고자 한다. 친일세력이 그들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썼던 가면, 독재의 주역들이 반인권적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휘둘렀던 칼, 바로 그 이념의 깃발을 흔든다. 이념 빼면 무엇이 남을까? 악행의 흔적처럼, 무식만 남을 것이다.
이념갈등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이 왜 분노하는가? 역사학으로서의 기본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념갈등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진정한 보수라면 이들을 비판해야 한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다수의 국가를 보라. 보수정당이라 하더라도,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고, 학살을 정당화하며, 독재를 변명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 정도의 수준 낮은 보수는 없다. 일본의 아베 정권을 제외하면 말이다.
과거를 향한 현재의 정치가 치열함은 조지 오웰의 말처럼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기 때문이리라. 기억의 정치를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정치인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과거의 상처에 책임을 느끼고, 그것이 재발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픈 과거를 망각할 수 있을까? 독재자 프랑코가 죽었을 때, 스페인의 좌우 정치세력은 프랑코 시대의 과거를 덮기로 했다. 바로 1977년의 망각협정이다. 그러나 망각은 영원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2007년 역사기억법을 채택한다. 프랑코 시대의 흔적을 지우고, 친프랑코 시위나 프랑코주의의 표현을 범죄로 규정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례처럼 화해는 진실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최소한 우리 후손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알릴 의무가 있다. 역사기억이 사회적 합의가 아니라 제도적 폭력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남북 분단도 모자라 이제 남남 분단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정치세력은 반성해야 한다. 화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 보수는 또다른 불행을 재생산할 뿐이다. 선조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기억의 내전을 부추기는 행위는 부끄러운 짓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 성찰하기 위해서다. 성찰하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이승만 영웅전·친일 미화’, 역사왜곡 교과서 심층해부 [한겨레케스트#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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