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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5 18:47 수정 : 2013.09.25 18:47

김중미 작가·기차길옆작은학교 상근자

매사에 원칙을 강조하는 대통령, 좀 갑갑하긴 해도 국민 앞에서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거라 믿었다. 복지국가가 꿈이었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른 것은 몰라도 복지정책만큼은 밀고 나갈 거라 믿었다. 부자 증세 없는 복지가 못내 걸렸으나 믿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기어코 노인연금에 대한 공약을 뒤엎었다. 추석 전, 야당을 향해 민생을 외면하면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힐 거라고 경고한 걸로 봐서 대통령은 민생과 복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미 노인 임플란트 공약과 4대 중증질환 보장, 중앙정부가 책임지겠다던 무상보육 공약을 축소했다. 복지공약과 함께 대선 승리의 쌍두마차였던 경제민주화 공약도 용두사미가 되었다. 어쩌면 정부여당도 내심으로는 국민적 저항이 걱정되어 무리하게 공안정국을 몰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추석이 지나자 언론들은 여전히 높은 대통령 지지율을 앞 다퉈 보도했다. 정부여당이 65살 이상 노인께 20만원씩 드린다던 노인연금을 차등지급하겠다고 발표하자 노인연금 공약이 애초에 무리수였다느니, 노인들은 오히려 차등지급을 원한다느니 떠들어댄다. 그런데 나는 보수 언론과 정부와 여당이 말하는 지지율과 민심이라는 것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 내가 느끼는 민심이 그들의 민심과 다르기 때문이다.

친정아버지는 내년이면 여든이다. 일흔살이 넘도록 일을 쉰 적이 없지만 먹고살고 자식 가르치느라 노후 자금 따위는 엄두도 못 냈다. 그래서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스페어 택시기사,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셨다. 여든이 가까워오자 더는 일자리가 없고, 아이엠에프에 무너진 자식들의 형편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행히 노인복지관에서 컴퓨터 수업을 들은 뒤 포토샵 보조강사 자리를 얻으셨다. 20만원 정도의 강사비와 9만원 남짓 되는 노인연금은 여든을 앞둔 노인에게 꽤 요긴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딱 그만큼의 여유라도 있길 바라셨다. 그래서 지난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복지공약을 반신반의하면서도 기대했다. 노인연금은 힘들여 일한 당신 세대에 대한 예우라고 여겼다.

아버지가 이번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 나는 모른다. 가난한 아버지는 노인연금이 차등지급된다 해도 혜택을 받으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버지가 기대했던 것은 65살 이상의 모든 노인에게 준다던 노인연금이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선하듯 주어지는 구제연금이 아니었다. 노인복지관에서 식판을 들고 점심식사를 기다릴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던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저려온다.

동서는 대형마트 의류판매장에서 10년 가까이 비정규직으로 일했지만 고용보험·퇴직금은 꿈도 못 꾼다. 여성 대통령을 염원했던 동서는 대통령의 “질 좋은 시간제 일자리”라는 말에 마음을 돌렸다. 동서는 대학생들과 시간제 일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설움을 토로했다.

시장에서 과일 노점을 하는 한 아버지는 명절 내내 좌판을 열었다. 명절 대목을 바라고 사놓은 과일들이 상하기 전에 하나라도 팔아야 했다. 백화점에서는 몇십만원 한다는 한우세트가 불티나게 팔린다던데 서민은 사과 몇개 살 여유도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한 어머니는 전세를 빼 차린 분식집이 장사가 안되자 추석을 앞두고 전을 부쳐 팔았다. 덕분에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는 공부방에도 오지 못했다. 그들은 배신감을 느끼지만 본심은 드러내지 않는다.

언론과 정부여당이 말하는 추석 민심은 언론이 왜곡한 진실을 강요당한 민심일 뿐이다. 국민들이 언제까지 본심을 감출 수 있을까? 민생과 복지는 따로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국민적 저항을 걱정해야 할 대상은 야당만이 아니다.

김중미 작가·기차길옆작은학교 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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