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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30 19:07 수정 : 2013.10.30 19:07

이범 교육평론가

10월 초 한국에서 열린 쇼트트랙 월드컵 경기에서, 관중들은 러시아 대표 ‘빅토르 안’에게 한국 선수들보다 더한 환호를 보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안현수가 러시아로 귀화한 것에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국민의 유난한 애국심마저 뒤로 밀려난 것은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안현수에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공정함’이란 본디 약자를 위한 개념이 아니다. 자유경쟁, 시장질서를 전제로 한다. 가장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이기는 것, 이게 바로 공정함이다. 그렇다면 안현수는 가장 뛰어난 선수이므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안현수는 그러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파벌과 조작이 작용했다고 의심했다. 그는 이미 강자 내지 기득권자일 수도 있지만, ‘불공정함’의 희생자로 보였기에 응원의 대상이 된 것이다.

나는 안철수 의원이 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특히 2011년 상반기 언론 인터뷰를 할 때마다 우리나라의 중소·벤처기업들이 ‘삼성동물원, 엘지동물원, 에스케이동물원’에 갇혀 있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했다. ‘동물원’이라는 표현에는 본인의 절절한 경험이 묻어 있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어떤 회사가 탐나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대기업이 그 회사의 주식을 51% 이상 사서 제 것으로 만든다. 그러면 주식을 갖고 있던 창업자·투자자·직원들이 돈을 번다. 돈 벌어서 소고기도 사먹고, 차도 바꾸고, 집도 넓힌다. 그러고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그 업계에서 창업하고 투자하고 새로운 일을 꾸민다.

이러한 순환이 곧 ‘창조경제’다. 창조경제가 우리나라에서 안 되는 건 대기업이 심지어 기술을 빼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법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송을 걸면 대기업이 이기기 때문이다. 기업 생태계가 이렇게 불공정해서는 새로운 분야를 키우기 어렵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탈바꿈하지도 못한다.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도 않는다.

작지만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를 운영하는 대학 동기가 말한다. “대기업에 뭔가를 제안하면, 그때는 별 반응이 없어. 그러다가 몇달 뒤에 불러서 가 보면, 이렇게 말해. ‘우리도 마침 비슷한 걸 검토하고 있었는데, 우리 회사로부터 그걸 수주받을 수 있는 영광을 당신네한테 주겠다’고 말이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경제 체계는 단순히 복지를 늘린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독일이나 스웨덴의 특징은 높은 수준의 ‘효율’을 ‘보장성’과 결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학진학률이 40~50% 수준이지만 첨단 산업 잘 해내고, 국가경쟁력도 최상위권인 것이다. 민간경제에서의 혁신이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공정함’이 전제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나라의 진보는 아직 사민주의를 배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마르크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노동-자본 관계에 집중한다. 현대자동차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온정적으로 본다. 큰 기업과 작은 기업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다. 어차피 작은 회사도 엄연히 ‘자본’이니, 한통속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보다 중소기업 사장이 더 약자일 수 있다는 의식이 없다.

나는 안철수가 이 블루오션을 개척할 적임자라고 봤다. 그러던 그가 ‘새 정치’라는, 어딘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 이제 보니 <안철수의 생각>은 진보 쪽 학자들로부터 배운 걸 정리한 모범답안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안철수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색깔을 찾아야 한다. ‘공정한 경제’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마음껏 투사할 수 있는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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