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0.31 18:50
수정 : 2013.10.31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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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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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 않습니까? 매카시 상원의원을 향해 웰치 육군 법률고문이 그렇게 말했다. 아무나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광인에게, 부끄러움을 아느냐고 물었다. 청중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1954년 육군-매카시 청문회장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광기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이성의 역습을 환영했다. 청문회는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매카시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해 12월 공화당의 보수파에 눌려 있던 합리적인 상원의원들이 나서, 매카시에 대한 불신임을 결정했다. 그는 무대에서 사라졌다. 좌절의 늪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다. 그리고 1957년 5월, 48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매카시는 죽었다. 그러나 매카시즘은 살아남았다. 20세기 가장 장수했던 정치선동이다. 대중의 불안을 자극해서,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더러운 수법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매카시즘을 다시 대면할 줄 몰랐다. 그것도 21세기에. 지난 대선 과정에서 죽은 매카시가 동원되었다는 흔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언제까지 북풍은 전가의 보도일까? 언제까지 매카시즘은 그들에게 만병통치약일까?
기억해야 한다. 누가 매카시를 죽였을까? 아는가? 그는 자멸했다. 언제나 권력은 오만으로 무너진다. 그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다. 왜 육군에도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떠들었을까? 발단은 징집영장이 나온 자신의 보좌관을 면제해 주거나 위원회에 파견해 달라는 요청을 육군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육군은 오히려 이를 계기로 삼아 육군-매카시 청문회로 반격했다. 매카시는 스스로 무덤을 팠다. 빨갱이 딱지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다, 들통이 난 것이다.
그리고 매카시를 정치적 자살로 이끈 것은 거짓말이다. 1950년 2월 국무부가 공산주의자들로 가득 차 있고, 205명의 명단이 있다는 주장은 뻥이었다. 매카시 위원회가 소환한 그 많은 사람들 중,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매카시는 언제나 거짓말에 태연했다. 진실에 구애받지 않았고, 도덕을 중시하지 않았다. 매카시는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너무 자주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한두 번은 몰라도 모두를 반복적으로 속이기는 어렵다.
광풍이 지나갔을 때, 미국의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은 매카시즘을 ‘안보를 희화화’해서 오히려, 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비판했다. 단지 중국 연구자라는 이유로 위원회에 소환당했던 학자들은 더는 중국을 연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다. 북한 변수를 국내정치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하는 사람들은 안보에 관심이 없다. 분단 이후 모든 북풍의 공통점은 국가의 미래를 걱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만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매카시의 후예로 나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관심사는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애국은 더욱 아니다. 바로 명성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매카시는 그의 소원대로 이름을 남겼다. 다만 악명으로, 혹은 오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뿐이다. 그를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얻었지만, 사냥이 끝났을 때 그를 솥에 넣고 삶아버린 사람들은 바로 공화당의 지도부였다. 그리고 보수 언론이었다. 매카시들은 권력의 냉혹한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념의 폭력이 아니라, 정치를 보고 싶다. 사라져 버린 단어들, 화해, 대화, 그리고 협력이라는 말들이 그립다. 언제나 과하면, 탈이 난다.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에도 미국의 헌법 정신, 다시 말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광기는 짧았다. 그러나 이성은 길다.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 이전에,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성의 연대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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