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4 19:06
수정 : 2013.11.0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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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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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협력업체 서비스 노동자가 자살을 했다. “너무 힘들었어요.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었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시대의 자살 노동자들의 빈소에는 1971년 전태일의 빈소에 달려왔던 대학생들도 재야인사도 없다. 우리는 전화만 걸면 곧바로 달려와 친절하게 삼성 가전제품을 수리해 주는 노동자가 사실 삼성 직원이 아니었고, 하루 12시간 일하고도 어떤 때는 집에 150만원도 못 가져가는 처참한 신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홍길동은 피를 토하듯이 아버지 홍판서 앞에서 천민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집을 떠났다. 조선 신분사회에서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면 양반의 자식이라도 천민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은 지위와 재산이 적자에게만 가도록 한 신분사회 지배집단의 논리였다.
그런데 21세기에도 이런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대기업이 자신의 필수 업무를 수행하는 일에 종업원을 직접 고용하지 않고 간판도 사무실도 제대로 없는 종이 회사를 만든 다음 그 회사가 모든 일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이 하청업체의 모든 노무관리는 사실 원청의 지휘 감독하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문서상으로는 별개의 회사가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 있고, 노동부나 법원은 노동자들에게 당신이 이 대기업에 직접 고용되어 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대기업의 손을 들어준다.
기업가 단체는 직접 고용을 해서는 기업 경쟁력이 없다고 하지만, 10조원의 순익을 내는 삼성전자 같은 경우도 그런지 설명하지 않는다. 보수 언론은 도급을 없애는 법을 만들면 6조원의 임금폭탄이 날아온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천민이 양반 행세를 하면 질서가 흔들린다던 조선 양반사회의 논리나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기업이 산다는 논리 모두 강자의 이익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비록 천출일지언정 아들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조선시대보다, 사용자이면서도 사용자가 아니라고 하는 이 시대의 위장도급은 훨씬 교활하고 기만적이다. 겉으로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이고 노동자는 노동3권을 누릴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정상적인 노사관계는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면 해고될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새 신분사회의 노예들은 이 거대한 거짓의 질서에 저항도 도망도 할 수 없어 개인적 죽음의 길을 택한다.
이윤을 생명으로 하는 기업이 노동자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거나 권리를 주장할 때, 사용자들이 협박 위협을 가하거나 교섭을 거부하고, 정부와 법원이 노골적으로 사용자 편을 든 일들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지구화의 조건에서 기업들이 죽기 살기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까다로운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자니 기업이 좀더 유연하게 노동력을 이용해야 하는 정황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고용하고도 “난 너를 고용하지 않았다”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런 자본주의의, 이런 국가는 전대미문의 것이다. ‘죽을 만큼 일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이런 자본주의하에서 법도 행정도 상식도 양심도 완전히 사치가 된다.
정직하고 투명하고 정정당당하게 사업을 하지 않는 기업이 서비스 분야 세계 1위가 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 사회는 복지국가는커녕 아직 근대사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구호 좋아하지 말라. 진짜 왕은 따로 있고, 왕이 있는 세상에는 당신 아들이 노예일 수 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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