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06 19:13
수정 : 2013.11.06 19:13
|
김현정 서울시립동부병원 정형외과 전문의
|
열여섯살 소녀가 시리아 반군을 돕겠다며 자발적 위안부가 되기 위해 고향 튀니지를 떠났다. “그 애가 세뇌당한 거예요.” 카메라에 잡힌 소녀의 아버지는 몸서리치며 절규한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위안부가 되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이고 천국에 가는 길이라고 선동하고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아내들까지도 같은 이유로 전쟁터에 보낸다고 한다. 결국 소녀들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정체 모를 임신이라도 해야지만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전해진다.
종교적 맹신이 빚어낸 참담한 모습이다. 맹신에는 판단력이 없다. 이성이 마비된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분별력이 작동을 멈춘다. 그래서 어처구니없고 무지막지하고 허무맹랑한 행동으로 거침없이 이어진다.
오래전 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아직 겨울인데도 후끈한 공기와 늘어선 야자수가 남국의 풍취를 흠씬 북돋워주었다. 우리는 한라산에 올랐다. 꼭대기에 다다르니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나며 시야가 탁 트였다. 백록담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물은 보이지 않고 분화구 속엔 널따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그렇게 한라산을 다녀왔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후에 친구들과 제주도 얘기를 할 때면 신나서 그때 얘기를 하곤 했다. 길은 어땠고 경치가 어땠고 별로 힘들이지 않고 금방 올라가더라 등등. 한라산에 갔다가 힘들었다는 친구에겐 그리도 맥이 없냐고 깔깔 놀리기도 했다. 그렇게 십여년쯤 흐른 어느 날, 우연히 또 한라산 얘기를 하는데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박장대소한다. “너 여태 그게 한라산인 줄 알았니? 그거 성산일출봉이었어.” 엥? 이럴 수가! 나는 멘붕에 빠졌다. 그리고 맹신이 깨졌다. 깨지고 보면 참 황당무계한 것이 맹신이다. 한 치 의심도 없었기에 얼마나 당당했던가. 우기고 윽박질러댔던 친구들에게 뒤늦게 미안했다.
의사들 이력 중에 가장 자신감에 찬 시기는 전문의를 막 따고 나서 약 이삼년의 기간이다. 머릿속에 방금 외웠던 지식들이 쌩쌩 돈다. 어느 엑스레이를 보면 1번부터 10번까지 감별할 진단명과 감별점이 주르르 떠오른다. 이런 자신감은 환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나타나고 치료법을 선택하고 권할 때도 드러난다. ‘이건 이겁니다. 저건 저겁니다.’ 명쾌하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현명한 선배들은 미리 충고한다. ‘그러다 환자 잡는다. 의사로서 평생에 후회할 실수는 이 시기에 다 일어난다. 확실할수록 조심 또 조심해라.’ 왜냐하면 사람 몸이 꼭 교과서대로 혹은 수학 방정식처럼 똑 떨어지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썩어서 못 쓰게 된 다리인 줄 알고 자르려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새살이 돋아난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5인 사람이 멀쩡하게 돌아다닌다. 맹신이 부서져 내린다. 더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한편,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본래의 원전 지지 입장을 급선회하여 단호하게 ‘원전 폐기’를 선언한다. 자신의 맹신을 깨고 나와 반대파인 녹색당의 정책을 과감히 수용한 것이다. 이런 유연한 실용주의 행보 덕분인지 그는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3선에 성공한다.
맹신이 병적 신념인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 말 그대로 아예 눈을 감고 고집불통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에 건강한 신념은 고집부리지 않는다. 합리적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다른 의견에도 항상 귀를 열어놓는다. 그리하여 때로는 메르켈처럼 상대방에게서 회심에 찬 ‘신의 한 수’를 가져오기도 한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