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13 19:18
수정 : 2013.11.1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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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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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 때 3000여명의 화랑도가 금강산으로 산행을 가는데, 혜성이 나타나 신라 왕을 상징하는 심대성(心大星, 전갈좌의 안타레스)을 범하자 이어 왜병도 침입하였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 융천사(融天師)가 나서서 <혜성가>라는 향가를 불렀다. 그러자 혜성도 사라지고 왜병도 제 나라로 돌아갔다.
이는 설화인가. 아니, 사실이다. 진평왕 9년(587년)에 퐁-강바르(Pons-Gambart) 혜성이 안타레스 인근에 나타났고, 이에 맞추어 왜병의 대군단이 침범하였다. 입시의 불안을 어찌 해소하는가. 현실적 대응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문화적 대응으로 부적을 몸에 두르거나 엿을 선물하지 않는가. 그처럼 화랑은 산행을 멈추고 왜병과 대적하는 한편, 천문과 의례, 사상에 밝은 화랑의 멘토인 융천사가 나서서 비나리로 향가를 부른 것이다. 융천사는 혜성을 ‘빗자루별’이라 부른 것에 착안하여 흉조의 혜성을 화랑의 앞길을 쓸어주는 길조의 별로 바꾸어 해석하여 노래하였다. 이에 화랑의 사기가 충천하자 왜병은 물러갔고, 혜성 또한 태양에서 멀어지고 보름달이 뜨자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는 필자의 연구서인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처럼 구술시대의 시는 비나리였다. 골방에서 혼자 쓰고 홀로 감상하는 문자시대의 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비나리는 대중과 함께 치르는 집단적 실천 의례다. 비나리는 사람들에게 숨어 있는,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에 대한 저항심과 생명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게 하여 대중을 바꾸고, 나아가 세상과 우주의 질서마저 변화시켰다.
어두운 죽음의 시대가 다시 도래하였다. 현 정권은 형식상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만 빼면 파시즘 체제다. 청와대-국정원-검찰-경찰의 사슬인 억압적 국가기구와 대형교회-보수언론-어용학자의 사슬인 이데올로기 국가기구 사이의 연합은 너무도 견고하여 한 몸으로 움직이면서 국민을 기만하고 의식과 무의식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 공약은 아예 집권 초기부터 사기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민의 연이은 촛불시위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검찰의 총수와 수사팀장마저 파렴치한 방법으로 내쳤다. 반대자나 비판세력을 ‘종북’으로 매도하고, 합법적인 정당과 단체마저 해체공작에 나서고 있다. 이로써 노동자 민중은 생존의 위기에 놓이고 국민의 자유와 인권은 유린당하고 민주주의는 껍데기만 남았다.
이에 대응할 야당은 무기력하고, 진보는 괴멸상태다. 대중은 신자유주의의 공포로 권위에 복종하거나 침묵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 길을 내야 했는데, 백기완 선생께서 분연히 나섰다. 평생을 맨 앞에서 목숨 걸고 지배층과 맞짱을 떠온 분이다. 유신시대와 전두환 정권 때 군사독재자들에 맞서서 죽음에 이르는 고문에도 꿈쩍하지 않았고, 지금도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노동자와 시민이 부르는 자리에는 어디든, 많게는 하루에 예닐곱 차례씩 달려가는 이다. 만추의 저녁인 11월29일 조계사에서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나서야 한다며 몸소 지은 시를 온몸으로 부르댈 것이다. 말들은 화살이 되어 꽂힐 것이며, 대중에 내재한, 변혁을 향한 분노와 열정에 불을 지를 것이다.
언제까지 고문으로 뼈마디가 시리다 못해 저미는 팔순의 노인을 영하의 거리에 나오시라 요청할 것인가. 이제 늙은 혁명가의 쇳소리에 우리가 답할 차례다. 구술시대의 마지막 시인의 비나리가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활활 태우는 들불이 되도록, 어디에 있든 우리 안의 불씨를 지피자.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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