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17 18:48
수정 : 2013.11.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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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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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개혁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 갔다. 중종 재위 10년 8월에 불쑥 등장해 재위 14년 11월에 홀연히 사라졌다. 숱하게 많은 드라마에서 다뤄졌듯이 그는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었다. 일체의 타협을 배제한 채 오직 개혁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일했다. “개혁을 급속도로 서두르는 것은 병을 고치려고 독약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몸만 상하게 된다.” 조광조 본인의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는 생각 때문에 서두르게 됐고, 그 결과 사림의 집권이 50년 정도 늦어졌다.
조광조는 왜 실패했나? 개혁의 주제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어젠다 세팅에서 패착을 두었다는 뜻이다. 조광조의 개혁 어젠다는 기신재 혁파, 소격서의 폐지, 현량과의 실시,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 등이었다. 기신재는 고려시대부터 시행되어온 궁중의 불교행사다. 소격서는 나라에 천재지변이 있을 때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현량과는 추천으로 역량 있는 재야 선비를 관리로 발탁하는 제도다. 위훈 삭제는 연산군을 축출하고 중종을 집권케 한 반정 공신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개혁에는 방향과 속도가 중요하다. 조광조가 제기한 어젠다들은 사실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와는 상관없었다. 민생보다는 일종의 정치개혁에 해당하는 사안들을 밀어붙인 셈이다. 개혁은 어떠한 형태로든 기득권 세력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개혁으로 득을 보는 사람들을 지지 기반으로 동원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혁명은 의지로 하지만 개혁은 정치력으로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방향이 잘못됐다. 우선순위를 잘못 정했다는 얘기다.
속도도 너무 빨랐다. 강고한 기성체제와 맞짱을 뜨려면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세력을 키워야 하고, 민심을 얻어야 한다. 스탈린이 1953년에 사망한 뒤 흐루쇼프(흐루시초프)는 때를 기다려 3년 뒤인 1956년에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이 1976년 사망한 뒤 덩샤오핑은 6년 뒤인 1982년에 이르러서야 마오가 ‘7가지는 잘했고, 3가지는 나빴다’는 비유로 과거청산을 공론화했다. 이런 예에 비춰 보면 조광조는 조정 내에 개혁파를 제대로 구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기득권 세력인 공신들과 제로섬 승부를 건 위훈 삭제를 이슈로 제기했다. 정암 조광조에게는 정치가 없었다. 꼿꼿 정암, 곧 오직 원칙과 소신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조광조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박 대통령도 조광조만큼이나 원칙과 소신을 앞세운다. 내가 옳다는 아집에 싸움을 즐긴다. 취임 후부터 지금까지 국정의 어젠다는 북방한계선(NLL), 국정원의 선거개입, 정상회담 대화록 등 온통 정치이슈 일색이다. 이 때문에 보통사람의 취중 토크도 이런 얘기로 다투기 일쑤다. 장삼이사의 커피 정담도 어색하게 끝나는 일이 잦아졌다. 그 원인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런 꼴이 계속되고, 민생이 실종된 데에는 박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에 따르면 민생지수가 더 나빠지고 있다. 설사 결혼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따지고 들어도 당장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성 본능, 조광조 모델보다는 대동법의 김육 모델, 이게 박 대통령이 보여줘야 할 리더십이다. 항간에 이런 말이 있다. 소통이 안 되는 것을 ‘불통’이라고 하고, 상대를 부정하는 걸 ‘박통’이라고 한다. 불통과 박통의 끝은 국민들로부터 심하게 당하는 ‘된통’이다. 무릇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이고(衆口 金), 세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 내는(三人成虎) 법 아니던가. 지금은 박 대통령이 굽힐 때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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