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1.24 19:09
수정 : 2013.11.24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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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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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에 있는 주일한국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의 오랜 상처가 다시 한번 언론의 눈에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강제징용자 22만9781명의 명부 65권, 3·1운동 피살자 630명 명부 1권, 또 관동(간토)대지진 희생자 290명 명부 1권 등 총 67권의 명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을 단지 과거사로 무심히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대법원이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아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또한 2011년 8월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외교적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피해에 대한 외교적 해결 노력을 촉구하였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 시절 위안부 피해자 청구권 문제 외교협의 요청 구술서를 두 차례 보내 양자 협의를 제안했지만 일본은 응하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냉랭한 외교관계가 이어지고 있어 인권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2006년 첫 집권 당시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를 모토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추구한 정책은 노골적인 군국주의 행보였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국정의 핵심 축으로 삼고 부시의 대북 강경론과 연계하여 아시아 전역에 군사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다 결국 1년 만인 2007년에 여론의 지지를 잃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런데 2012년 말 중의원 선거로 다시 총리가 된 아베는 또 한번 군국주의의 길을 내달리고 있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짐에 따라, 미국은 일본이 일정한 견제력을 행사하고 더 많은 군사적 역할을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을 이용하여 일본은 과거의 전쟁 침략국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아시아의 핵심 국가가 되고자 한다. 그 일환으로 아베 정부는 헌법 제9조를 재해석하여 일본 영토 밖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도 위헌이 아니라며, 자위대의 역할을 확장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에 긴장과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 커가고 있는 극우 인종주의와 인권 경시 풍조 또한 심각히 우려가 되는 사안이다. 소위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은 반한 또는 혐한 시위를 벌이며 재일동포들에게 “스파이의 아이들 한반도로 돌아가라”고 선동하는 등 극우 인종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집권 자민당이 2012년 채택한 헌법 개정안은 심각한 인권 후퇴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특히 자민당 안은 인권은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자유 획득을 위해 노력한 성과이며 침해할 수 없는 영구한 권리라고 하여 인권을 최고 법규로 삼고 있던 현행 헌법 제97조를 통째로 삭제하려 한다. 또 헌법 제12조에 자유와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표현을 넣어 시민적 자유에 제한을 가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때문에 자민당의 헌법안은 일본판 유신헌법이라는 지적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일본이 정녕 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군사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소프트파워를 키워야 한다.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1급 전쟁범죄자를 애국 인사로 미화하고, 식민지 독립투사를 범죄인으로 매도하는 시대착오적 역사의식을 갖고서는 주변국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아베 정부가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면 군국주의를 강화하는 대신 전쟁범죄와 인권침해의 상처부터 치유하고 볼 일이다.
백태웅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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