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24 19:07
수정 : 2013.12.2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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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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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 <제이티비시>(JTBC) 사장이 자신이 진행하는 멀쩡한 뉴스에 대해 중징계를 받은 일은 민주화 이후 한국 언론사 최대 희비극이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건 방송 심의를 넘어선 문제다. 우리 사회에 구조적으로 뿌리내린 승자독식과 정치적 양극화 문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중징계 결정을 내린 곳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방송 심의를 위원회 체제에 맡긴 데는 이유가 있다. 이런 일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급변하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녹여낸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협치의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다. 중간지대의 타협점을 내부에서 찾으며 의사결정을 하라는 뜻이다.
문제는 이 위원회가 대통령과 국회의장과 국회 담당 상임위원회가 각각 추천한 3명씩의 위원을 대통령이 위촉해 구성된다는 데 있다. 국회 추천 몫은 여야 의석수에 비례해 적절히 비중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대통령과 여당이 추천한 위원이 6명으로 절대다수다. 지난 대선에서의 대통령 지지율, 국회에서의 여당 의석수, 총선에서의 여당 정당지지율 등 어떤 지표를 봐도 40% 초반에서 50% 초반 사이다. 승자독식 원칙이 철저히 관철되면서 국민의 평균적 생각을 반영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위원회는 우리 사회 주요 의사결정 구조를 거의 정확하게 보여준다. 완충장치 없는 승자독식 의사결정 구조다. 정권을 잡으면 사회 곳곳의 의사결정을 독점할 수 있고 반대 의견은 묵살하는 게 정상처럼 보인다. 위원회처럼 원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려고 만든 조직조차도 독점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회의 다른 영역들은 말할 것도 없다.
반대편이 이런 구조를 놓아두었던 이유도 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중에는 그 모든 것을 뜻대로 끌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다음번에 정권을 잡으면 모두를 한꺼번에 되찾겠다는 기대도 한몫한다.
이런 적대적 양자대립 구조에서는 과거 그나마 완충 구실을 하던 시민단체나 전문가들도 존재감이 사라진다. 방통심의위라면 어느 편에서 추천받았든 ‘언론인의 양심’을 중심으로 내부 합의를 이뤄 나갈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전문성도, 어떤 중립적 타협 의견도 ‘어느 편이냐’를 묻는 질문 앞에 힘을 잃고 만다.
극단적으로 이성을 잃은 결론을 내기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구조 탓이다. 손석희 사장 중징계 결정은 그래서 구조적이며, 누가 정권을 잡든 반복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위원회가 다양한 정당이 선거 때의 지지율만큼만의 지분을 가지고 위원을 추천하는 구조로 구성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이런 극단적인 결정이 내려졌을까?
물론 그래도 국회의 양당 분점 구조가 이어지고 다수당이 독점하겠다고 나선다면 문제는 마찬가지다. 궁극적 문제해결은 사회가 다양화한 만큼 정치가 다양해져야 가능할 것이다.
사회 다양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커지는 다양성은 역동적인 경제, 혁신적 기업가정신이 자라는 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다양성을 제대로 소화하는 절차를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대로는 정상적 국가 운영이 어렵다.
5년에 한번 사생결단하며 투표하는 것만 정치가 아니다. 오늘 내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주고, 적절한 타협점에서 의사결정이 이뤄지도록 만드는 절차가 바로 정치다. 이런 절차를 잘 만들어둔 체제가 민주주의다.
이런 근본적 해결책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가? 물론 두번째 방법도 있다. 위원회를 양심적 언론인들의 자율심의에 맡기는 것이다. 그것도 탐탁지 않다면 세번째 방법은,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서 언론 자유를 적극 지지한다며 위원회의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가장 현실적일까?
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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