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31 19:11
수정 : 2013.12.31 19:17
|
정정훈 변호사
|
어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삶의 공간을 바꾼다. 그 이유는 무얼까? 전원생활에 대한 목가적 동경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근본적인 이유는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도시라는 공간에서 삶의 주인됨을 허락하지 않는 관계들을 가지치기하기 위한 공간의 이동을 우리는 ‘귀농’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닐까?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만해 한용운의 ‘복종’이란 시의 일부분이다.
학생이었던 나는 교과서에 실린 만해의 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절대자에 대한 구도” 이런 교과서적 설명도 그저 알 듯 모를 듯 했다. 그나마 이제 어렴풋이 그 의미를 짐작해가는 것은, ‘당신’과 ‘나’가 결국은 한 몸으로, 내 삶의 주인됨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자발적·능동적 관계에서만 ‘복종’이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가령 법이나 규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때, 그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당신을 보았습니다’ 1926), 즉 권력의 헛된 징표에 불과하다. 이런 관계는 아름다운 복종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만해의 시는 자신이 입법자(주권자)이자 법 적용의 대상자라는 점을 ‘복종’이라는 반어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 일부에서는 ‘귀족노조’의 파업이라고 했다. 평균 연봉이 6천만원이나 되는 사람들의 불법파업이라고도 했다. ‘귀족노조’라는 단어의 불순함 등 철도파업에 관한 다른 논점들은 제쳐두자.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그들이 형사처벌, 손해배상, 징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파업에 나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삶의 터전에서 주인됨을 회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삶의 뿌리가 되는 공간이 둘로 쪼개지고 그중 하나는 애물단지 껍데기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들의 선택은 파업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그 터전을 떠나지만, 철도노조의 조합원들은 삶의 터전, 바로 그곳에서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삶의 중심 공간인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그저 결정된 사항이 적용되는 대상자였을 뿐, 스스로 결정하거나 그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대다수 노동자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정리해고가 이루어져도, 이는 단체교섭의 대상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상 이사회는 주주총회의 대의기구일 뿐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령 독일에서는 노동자가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경로는 중첩적이다. 노동자가 5명 이상인 기업에는 설치가 강제되어 폭넓은 권한이 부여되는 ‘종업원평의회’가 있고, 이사회의 구성과 역할에서도 노동자 대표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철도노조의 파업 철회에 대해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비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절망은 허망한 것, 희망이 그러하듯이!”(‘들풀’) 철도노조가 파업 철회 기자회견에서 밝힌 다짐이면 충분하다. “국민 참여가 보장되는 이사회 구성 등 공기업 지배구조를 개혁해 나가겠다.” 이런 다짐이라면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철도노조 힘내라고 외치던 시민들의 믿음에 답할 수 있다. 이번 철도파업을 통해 우리는 민영화에 대한 인식 변화의 계기와 함께 기업 내부의 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화두를 얻은 것이다.
정정훈 변호사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