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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14 18:49 수정 : 2014.01.14 18:49

이원재 경제평론가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우리 후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책에서 100년 뒤인 2030년의 삶을 그려낸다. 그는 100년이 지나고 나면 인류는 이미 생계를 위한 노동이 거의 필요없을 정도로 생산성이 높고 자본이 축적된 상태일 것으로 봤다. 주당 평균 15시간만 일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먹고사는 일보다 여가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의 문제를 푸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지며 문학과 예술의 문제가 경제 문제보다 앞선다. 인류는 마침내 지혜로움과 유쾌함과 풍족함을 달성한다.

케인스는 당시에 견줘 경제가 최고 8배가량 성장하면 이런 상태가 가능하다고 봤다. 흥미롭게도 현재 경제를 당시와 견주면 이미 그만큼 성장했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 경제도 지난 30년만 따져도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8배 이상 성장했다.

그런데 왜 세계는 케인스의 생각대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우선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 케인스가 생각한 대로 적절한 선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인간이 생계를 해결하고 적절한 생활을 달성하고 나면 경제적 욕망은 더 커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케인스의 첫째 오류였다. 자원이 고갈되고 대기가 엷어지고 기후가 변화해 종족이 공멸할지 모른다는데도 욕망은 멈추지 않았다.

분배의 문제도 있다. 우선 한 사회 내의 빈부격차 문제가 있다. 모두가 8배 커진 경제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100배를 누리고 누군가는 전혀 누리지 못한다. 물론 국제적 격차도 있다. 미국이나 서유럽과 아프리카나 남아시아의 격차는 심각하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기여한 만큼 분배받는 게 아니라는 정의의 문제가 있다. 토지와 부동산으로부터 나오는 불로소득이 근로소득보다 월등하게 여겨지는 한국 사회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분배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의 정당성도 문제라는 이야기다.

노동시간이 줄지 않더라도 일이 보람있고 유쾌하다면 케인스의 꿈은 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생계 때문에 억지로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하는 대부분의 노동인구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대부분 현대인에게 일자리는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는 ‘자리’일 뿐 보람있는 ‘일’이 있는 일터가 아니다.

문제만 늘어놓고 보면 막막해 보이지만 이 모든 문제에 대해 이미 인류는 답을 내놓고 있다. 욕망의 문제는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지속가능한 소비와 지속가능한 생산을 함으로써 해결해야 한다는 논의가 주류다. 이런 생산과 소비가 모이면 경제뿐 아니라 사회와 환경도 고려한 ‘지속가능한 발전’이 된다. 유엔은 이미 이 새로운 발전모델을 지지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행복 지디피(GDP)’ 같은 지표도 개발되고 있다.

분배 문제에도 답이 있다. 이미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몇 차례나 당선의 영예를 안은 경제민주화는 분배 정당성을 바로잡자는 논의다. 한 사회의 분배 문제는 대체로 복지정책으로 바로잡으면 된다. 국가간 격차 해소를 위해서도 국제원조와 공정무역이 거론된다. 한국에서도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논의들이다.

유쾌한 일터를 추구하는 흐름도 이미 있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 등에서는 일하는 사람이 주인이거나 사명을 갖고 일하는 기업 형태가 제시된다. 구글이나 실리콘밸리의 벤처기업들에서처럼 개개인이 모두 기업가정신을 갖고 창의적인 일을 하도록 만드는 시스템도 대안일 수 있다.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다. 정치는 우리 삶에 맞닿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경쟁을 펼치는 장이어야 한다. 이미 나와 있는 문제조차 묻어 버린다면 그런 정치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케인스가 꿈꿨던 지혜롭고 유쾌하고 풍요로운 삶은 가능하다. 선택하고 행동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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