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1.20 19:04
수정 : 2014.01.20 21:43
|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칠순인 아버지와 추어탕을 먹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사르니, 손자 녀석이 잽싸게 입김을 불었다. 가가소소, 웃다가 익숙한 동네 길을 걸었다. 고향인 도봉구 쌍문동에서 나는 37년을 살았다. 서울도 고향이냐 비웃는 친구들에게, 그럼 목련나무의 등걸을 쓰다듬으면서 울고 웃던 내 삶은 유령인가 반문하고 싶었다.
아침에는 아우와 함께 김수영 문학관에 들렀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되고, 또 일요일 오전이었으므로 방문객은 우리 둘뿐이었다. 문학관이 개관한다고 했을 때, 나는 반갑고 또 의아했다. 한국문학사의 ‘거대한 뿌리’인 김수영 시인을 기리는 시설이 만들어졌다는 점은 반가웠지만, 왜 설립 주체가 대한민국도 서울특별시도 아닌 도봉구인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해 보니, 기초자치단체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기초자치단체이기 ‘때문에’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속에 고즈넉하게 깃들어 있는 문학관의 방명록을 보니,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유치원생부터 인근 경로당의 어르신들까지, 김수영 시인의 본가가 이곳이었다고, 하는 놀람과 자부심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애국심을 윽박지르는 사람들이 요즘 늘고 있다. 그런 추상보다는 자기가 나고 자란 마을을 아끼는 마음이 더 소중한 가치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김수영에게 나라가 잘린 현실 속에서의 애국심은 경멸받아 마땅했다. 그는 서울사람인 동시에 세계인이었고, 북으로 간 김병욱과 같은 동무를 그리워해 슬퍼할 줄 알았던 눈물 많은 시인이었다.
반면, 아들에게 쌍문동은 아기공룡 둘리의 고향으로 기억된다. 본가에 갈 때마다 이 어린이는 “아빠, 할아버지 집에 가면 둘리 볼 수 있어?” 하고 설레어한다. “고럼, 고길동 아저씨도 볼 수 있다!” 하고 나는 으스대지만, 한 번도 약속을 지켜본 적은 없다. 그런데 김수영 문학관의 리플릿을 보니 머지않아 이곳에 ‘둘리뮤지움’이 생긴다고 적혀 있다. 부천시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야 둘리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하고 반가워했다. 물론 둘리의 진짜 고향은 남극이다. 그가 빙하를 따라 어떻게 쌍문동까지 흘러왔는지는 미스터리이지만, 그런 식이라면 외계에서 온 또치나 가수를 꿈꾸는 아프리카 출신 마이콜이나 고향이 쌍문동이라는 말도 이상하다.
내 감수성의 원형은 김수영에게서, 유머감각의 토대는 둘리에게서 왔다. 대학 시절, ‘근로자’가 아니라 ‘노동자’라는 말을 처음 배운 것은 전태일 평전에서였는데, 그의 서울 본가는 지금도 내 본가의 지척에 있다. 생계를 감당하기 위해 복덕방을 했던 어머니가 고 이소선 여사나 작고한 김근태 의원의 부동산 거래를 우연히 중개하기도 했는데, 생업이었으므로 그게 뭐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도봉구는 서울의 자치구 가운데서도 재정자립도가 가장 낮은 곳 중 하나다. 그러나 이곳에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역사와 문화가 있다. 함석헌, 계훈제, 홍명희, 염상섭, 정인보, 전형필, 송진우, 김병조, 천상병, 오윤 등 걸출한 근현대사의 인물들이 풀뿌리 민중들과 함께 이곳에서 역사와 기억을 만들어왔다.
물론 나는 이런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왜 그랬을까? ‘미친 모더니티’라고 표현해야 마땅할 한국의 근대화는 마을의 기억을 덮으면서, 국가, 반공, 성장, 출세, 부자의 속도전으로 사람들을 윽박지르고 또 홀려 왔기 때문이다.
김수영과 아기공룡 둘리를 생각하니, 옛 모습이 사라진 이 마을에도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겠다. 동지가 지나더니, 목련나무도 잎눈이 제법 부드러워졌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