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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4 18:50 수정 : 2014.02.04 18:50

이원재 경제평론가

“결항입니다.” 아메리칸항공의 ‘공지’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같은 비행기에 타려던 240명의 다른 승객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짐을 잔뜩 실어 놓은 채 탑승구 앞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항공사 직원들끼리는 이미 ‘결항 가능성이 80%’라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질문하면 ‘내게는 답할 권한이 없다. 공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공지’는 저녁 여섯시이던 원래 출발시간보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 ‘공지’ 뒤 탑승구 앞은 아수라장이 됐다. 기다리던 승객들은 승무원이 서 있는 입구 앞으로 한꺼번에 몰려갔다. 회사원들은 전화로 미팅 일정을 취소하며 혼란에 빠졌다. 지친 어린이들은 칭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직원들은 ‘공지를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출발시간보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그 무서운 ‘공지’가 나왔다. 모두 다시 짐을 찾아야 하고, 그 짐을 가지고 거꾸로 출국 취소 수속을 해야 하고, 공항 문으로 나가 버스를 타면 근처 호텔로 가게 될 것이니 거기 가서 자라는 내용이었다. 실은 인터넷을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정보를 두 시간 만에 ‘공지’한 것이다.

그 뒤로도 정보는 없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출발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호텔 직원들에게서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새벽 4시에 예고되지 않은 모닝콜이 울렸다. 바로 짐을 싸서 나오라는 ‘공지’였다. 하지만 비행기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설명은 없었다.

문득 몇달 전 비슷한 상황에서 경험했던 싱가포르항공의 대조적인 상황대처법이 떠올랐다. 지난해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의 불시착 사고가 있었을 때 나는 이번과 비슷하게 탑승구 앞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모든 항공기가 연착 또는 결항이었다. 탑승구 앞의 승객들은 직원들에게 몰려갔다.

그때 내가 타려던 싱가포르항공에서는 정보를 수시로 공개했다. 우리가 타려고 했던 항공기가 사고 때문에 공항에 내리지 못해 지연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 항공기가 대신 인근의 다른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알려줬다. 회사의 공식 ‘공지’가 아닌 ‘현장의 판단’이 알려졌다. 두 시간쯤 지나자 기내에 있던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꺼내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8시간을 기다렸지만 불만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새로운 ‘현장의 판단’이 알려질 때마다 승객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상황에 대처했고 자리에 앉아 나누어준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다.

두 항공사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아메리칸항공은 승객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를 모두 제공했다. 호텔 숙박과 저녁 뷔페도 제공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백명의 숙박과 식사를 마련하기 위해 직원들은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회사 쪽은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공지’만 했을 것이다.

싱가포르항공이 승객들에게 추가로 제공한 것은 거의 없었다. 샌드위치를 미리 나누어줬을 뿐이다. 대신 ‘정보’를 제공했다. 잘못되면 잘못되는 대로, 불확실하면 불확실한 대로 유연하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럴 권한이 현장에 있었다. 아메리칸항공 직원들이 ‘공지를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정부와 기업은 개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양의 정보를 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정보 공개에 인색하다. 위기 때 더 그렇다. 사실 투명하고 유연하게 정보를 공개하면 많은 경우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소비자 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그렇다. 모두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에서 방문연구원 생활을 하기 위해 출국하던 중 얻은 작은 깨달음이다.

이원재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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