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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5 19:15 수정 : 2014.02.05 19:15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 한 떨기 홀로 피어있네/ 사랑하던 동무들은 모두 사라졌네/ 서로 얼굴 붉히고 맞대어 한숨짓던/ 그 꽃잎, 그 꽃봉오리들 모두 지고 없네.” 요즘 자주 애창하는 아일랜드 민요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꽃’ 1절이다. 원래는 함께 일세를 풍미하였던 바이런과 셸리도 가고 토머스 무어 시인 자신만 남은 상념, 이를 일반화하여 홀로 남은 이들의 고독과 무상을 노래한 것이지만, 요새 진보운동을 하는 자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다.

지금 이 땅의 진보는 괴멸되고, 몇몇만 남아 진보의 꽃을 피우려 하지만 깊은 고립과 고독 속에 있다. 하지만 세계는 모순의 정점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진보가 헤게모니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이다. 이 괴리는 어디서 빚어지는가. 자본-국가-보수언론-대형교회-어용학자의 카르텔이 너무도 공고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노동 배제가 너무도 혹독하기에 상황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문제는 진보에 있다. 진보가 분열된 채 성찰과 혁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보가 하나로 단결하여 제대로 저항한다면, 모든 것이 상호 역학적인 관계에 있기에 정권이 저리도 야만적이지 못할 것이고 대중은 희망의 선택과 실천을 할 것이다.

만인이 돈을 신으로 섬기며 우정과 사랑을 배신하며 인간성을 포기한다. 돈 몇 만원 얻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1%들이 금융과 신용을 조작하여 폭리를 취하고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를 남발하고 노동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부를 독점하고 있다. 국가는 자본과 야합하여 시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며 폭력과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교환가치가 다른 가치를 대체하면서 만인이 만인을 향하여 투쟁하고 전투하듯 일하고 서로 불안, 고독, 소외, 스트레스, 병, 타락을 조장하고 있다.

이것은 정녕 지옥의 풍속도다. 지금 우리가 이런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자본주의를 제외한 인류 역사에서는 돈을 중시하거나 이기적인 자들을 경멸하였고 심한 자는 공동체에서 추방하였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마을 안에서 웬만한 생활도구나 농기구는 물론 나들이옷까지 서로 빌려 사용하였고, 병들고 가난한 이에 대한 상호 부조를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진보적 인간이란 돈과 권력을 경멸하고 인간성, 인간답게 하는 가치인 사랑, 우정, 동지애, 자유, 정의, 연대를 추구하고 더 약한 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품성을 지니고서 자기 앞의 세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여 판단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반대하고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 공동체를 꿈꾸며 이를 위한 실천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자다. 돈이나 권력을 밝히며, 타인을 위한 희생을 마다하고 이기적 욕심에만 집중하며, 공부는 하지 않고 종파나 자기 논리만 고집하고, 약자의 고통에 무감하며, 말이나 글, 에스엔에스(SNS)로만 진보를 외치며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섣불리 타협하며 이 체제를 개량적으로 개선하려는 자는 진보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내면화하여 경쟁과 화폐 증식의 욕망을 추구하고 정리해고의 공포로 권위에 복종하면서 동지애와 연대정신을 상실한 내 품성부터 철저히 성찰하자. 진보의 대의도 상실하고 우리에게 맞는 유토피아의 꿈을 버린 채 대중과 공부는 무시하고 자기비판은 두려워하면서 종파에 기반한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하였던 것을 처절하게 반성하자. 그리고 반신자유주의와 반자본의 깃발 아래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투쟁하여 차이를 소멸시키고 연대정신을 되찾자. 제발 새로운 방식으로 대중과 함께 신명나게 싸우자.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이도흠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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