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2.09 18:40
수정 : 2014.02.0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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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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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를 표방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표출되는, 그러나 너무 당연시하거나 익숙해져서 잘 보이지 않는 고정관념이 있다. 바로 선거주의(electoralism)이다. 흔히 선거주의는 자유선거를 민주주의를 가름하는 징표로 삼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선거주의는 정치를 선거로 좁히거나 가두는 한편, 선거에서 이기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린다는 지적 오류를 말한다.
무릇 민주주의 체제라면 선거를 통해 여야가 뒤바뀌는 정권교체는 언제든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여당이 잘못하면 그 책임을 물어 정권 담당자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서 무조건 정책레짐(policy regime)이 바뀌는 건 아니다. 집권당이 달라져도 국정의 기조나 정책의 기본틀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는 인물교체일 뿐 정책교체는 아니다. 따라서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은 선거주의가 낳는 위험한 착각이다.
선거주의에 빠지면 세 가지 폐해가 생겨난다. 우선, 일상정치를 소홀히 하게 된다. 2014년 2월을 기준으로, 무소속까지 포함해 진영으로 나누면 야권의 의석은 140석이 넘는다. 의회가 지닌 힘을 고려할 때 이런 정도의 의석이면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야권은 6월의 지방선거, 7월과 10월의 재보궐선거 성패에 목을 매달고 있다. 그런 선거에서 지더라도 일상정치에서 더 소중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일상정치에서의 성과가 쌓여 선거정치의 결과가 만들어지는데도 일상정치를 소홀히 하는 건 무책임하다.
둘째, 선거주의에 의하면 선거 승리가 모든 성과를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오산이다.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론을 고려해야 하고, 주고받는 타협이 불가피하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건 ‘좀비민주주의’다. 따라서 선거에서 이기면 나머지는 다 해결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어떤 주제로 어떻게 이기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하고, 이긴 다음의 리더십이나 게임플랜도 중요하다. 준비 없는 통일이 재앙이듯이 준비 없는 집권은 위험하다. 맡겨봤더니 별거 없더라는 생각을 낳으면 다시 집권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셋째, 인물 중심의 계파주의가 등장한다. 정치과정 중에서 선거만큼 인물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경우가 없다. 선거에서는 부득불 인물 요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거 프레임에 입각해 정치에 임하게 되면 잠재 후보를 쳐다보면서 누가 적합한지 따지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유력한 후보별로 그룹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계파다. 이 계파가 후보직을 놓고 격돌하게 되므로 자연스럽게 계파주의가 득세하게 된다. 선거는 사람을 뽑을 뿐만 아니라 어젠다, 노선 등을 뽑는 사회적 합의 절차다.
진보진영은 중독성이 강한 선거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거제도와 관행 등 이긴 사람이 전부를 차지하는 게임의 룰 때문에 강제되는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선거가 곧 정치는 아니다. 선거는 정치의 일부분일 뿐이다. 선거주의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일상의 정치에서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 것인지, 집권하면 뭘 어떻게 할 것인지를 준비하고 점검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의 질이 좋아지고, 정치인의 역량도 업그레이드된다. 일상정치에서 괜찮은 정치인이나 좋은 리더가 배출되고, 그들이 경쟁을 통해 강한 후보로 벼리어지는 게 정상적인 정치문법이다. 따라서 선거의 성패는 정치의 결과이고, 선거가 정치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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