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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10 18:37 수정 : 2014.02.10 18:37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스마트폰을 터치하고 있는 손가락의 율동은 분주하다. 스마트폰과 신경회로가 리시버를 통해 접속되어 있는 지하철 안의 풍경은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묵시적 삶에 가까울까, 아니면 시인 함민복이 세상의 병적 징후를 진단하려는 의사의 청진기로 시화했던 풍경에 가까울까.

오늘의 인문학 열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두 사람의 글과 책을 읽었다. ‘대중적 인문학’ 열풍을 분석하고 있는 문강형준씨의 칼럼(<한겨레> 2월8일치 23면)과 ‘고통의 인문학’의 현장기록을 쓴 <살아가겠다>의 저자 고병권씨의 책이 그것이다.

앞의 칼럼은 이른바 ‘힐링 인문학’으로 회자되는 대중적 인문학의 허구성을 ‘참다운 공부’의 문제와 연계시켜 송곳처럼 비판하는 글이고, 후자의 책은 노들야학에서의 철학 강의를 비롯해 고통의 현장에서 공명한 한 인문학자의 체험과 성찰을 담고 있는 책이다. 나는 이 두 분과 내밀하게 교유한 경험은 없지만, ‘인문학’을 둘러싼 기묘한 풍경에 대한 고민을 얼마간 공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한다.

고병권씨와는 좀 다른 경로지만, 나는 시 읽기를 ‘말’을 잃은 사람들과 해온 경험이 있다. 수용자, 탈학교 청소년, 북한이탈주민, 저소득 시민, 노숙인, 지역아동센터의 어린이들 등 대상은 다양했다. 나는 ‘시’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강의 도중에 여성들은 많이들 울었고, 남성들은 하품을 하거나 분노를 표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른바 중산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나 알 만한 대기업의 퇴직 임원들, 또는 공무원들과 인문학을 주제로 조찬강연 비슷한 것을 한 적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이분들은 앞의 분들과 달리 ‘문제제기’나 ‘완곡한 이견’을 제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지만, 대개는 눈을 감고 침묵하는 일이 많았다.

어느 편이냐면, 나는 ‘고통의 인문학’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인문학자들이 필사적으로 자기의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배움의 장소라 생각한다. 그러나 대체로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이 응답하는 ‘위안의 인문학’이라고 해서 그것이 명백한 허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남의 백화점 문화센터에서도, 자신의 삶이 가짜 욕망에 휘둘려 소모되고 있다고 부끄러워하는 대중들은 존재하며, 교도소 안의 장기복역 수용자들에게서 가장 완고한 지배논리를 발견하는 아이러니는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문학의 장소에서 발견하게 되는 기묘함은 계층적·계급적·젠더적 차이와 무관하게 “삶이 고통스럽다” “미래가 없다”라는 의미상실의 위기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절박함의 강도는 다르지만, 그렇다면 이 존재론적 위기의 다종다양한 형식의 중핵적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끈질기게 던져야 하고 가능한 답안지를 준비해야 한다.

문강형준씨의 말처럼 ‘위안의 인문학’은 카리스마적 교주와 신도의 관계로 결속되는 주술적 경향이 분명 있다. 고병권씨의 말처럼 ‘고통의 인문학’은 계몽 너머의 ‘혁명적 정념’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또한 교사 편에서의 ‘오인’일 수도 있다.

카타르시스 장치로 기능하는 위안의 인문학 교주는 그 선전의 강렬함의 강도와 비례하여 빠르게 소모될 것이다. 고통의 장소에서 돌연 솟아오르는 수강생들의 해방의 정념이라는 것 역시, 교실 너머의 더 크고 복잡한 정치적 세계와 결합되지 않는다면, ‘위안의 인문학’으로 손쉽게 퇴행한다.

어쩌면 진실은 인문학의 장소에서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교 앞에서 인문학이 무력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비대칭성’이 그곳에서는 진정으로 해소되기 때문이다. 모두가 부처고 예수라 하지 않는가.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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