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16 18:35
수정 : 2014.03.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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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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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는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한 학생의 다소 뜬금없는 물음에 퍼뜩 떠오른 인물은 빌리 브란트였다. 독일의 복지국가 체제를 완성했고,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길을 열었으며, 철저한 과거 청산으로 유럽연합의 터를 닦았고, 지구적 차원의 불평등 해소와 제3세계 지원에 앞장섰던 이가 브란트다. 한 정치인의 비전이 세계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브란트보다 잘 보여준 정치가가 있을까.
그러나 내 대답은 “넬슨 만델라”였다. 브란트는 가능성의 최대치를 보여주었지만, 만델라는 불가능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이념 문제보다도 풀기 어렵다는 뿌리 깊은 흑백 인종 문제를 해결했고, 오랜 분쟁으로 쌓인 흑인 부족들 간의 원한의 응어리를 풀어낸 이가 만델라다. 모든 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민주주의와 평화가 그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국민들과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는 그의 얼굴에 번져가던 미소는 20세기 정치가 도달한 가장 매혹적인 표정이었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도덕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진정성의 정치가 기적을 만든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증언하는 순간이었다.
돌아보면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과 감동이 없지 않았다.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환희와 감동을 누가 잊을 수 있겠는가. 수없이 사선을 넘나든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순간은 분명 한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아시아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최고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노무현 동영상’이다. 2000년 총선에서 종로구 국회의원이던 노무현이 당선 가능성이 높은 자신의 지역구를 버리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부산 지역에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벌이던 시절의 영상이다. 당시 그는 철저히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상대당 후보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영상은 한 동네 주차장에서 유세하는 노 후보를 비추는데, 청중이라곤 달랑 주차장 직원 한 사람뿐이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연설을 이어가는 이 지역주의의 순교자를 보며 마음속에선 뜨거운 것이 치솟고, 눈에선 연신 눈물이 쏟아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렇게 한 정치인이 내 가슴속에 들어온 것이다. 노무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진정성에 있다. 난공불락이라던 이회창을 무너뜨린 노무현의 기적은 정치인의 진정성과 대중의 감수성이 극적으로 만나면서 폭발한 정치혁명이었다.
정치인의 진정성이 정치적 이념보다 더 강력하게 대중을 움직이는 ‘진정성의 정치’는 노무현 이후 안철수에게로 이어진 것 같다. 노무현이 ‘정의로운 패배’를 통해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면, 안철수는 ‘아름다운 양보’를 통해 대중의 사랑을 쌓아가고 있다. 열 배가 넘는 지지율을 갖고도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넘겨준 일이나, 여론조사에서 뒤진 문재인에게 대선 후보를 양보한 일은 한국 정치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자기희생적 결단이었다. 최근 민주당과의 통합을 전격 발표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통합신당 창당을 선언함에 따라 그는 거대한 정치적 지각변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제 안철수는 “새누리당의 확장성을 저지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현실적 힘을 얻게 되었고, 1987년 야권 분열 이후 구조적으로 취약해진 민주개혁세력은 다시 강력한 야당을 복원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노무현의 순교자적 진정성이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민주주의를 성숙시켰듯이, 안철수의 희생적 진정성이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수구세력을 저지하고 민주개혁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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