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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3.24 18:45 수정 : 2014.03.24 18:45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잠든 자식의 얼굴을 골똘히 쳐다보다 머리를 쓰다듬었다. 뺨을 한번 만지고,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손바닥과 발바닥을 가만히 쥐어본다.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다. 너희가 직면할 미래는 어떤 세계일까.

부모들은 얼마간 ‘미래학자’를 자처한다. 자식들이 직면할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서 지식과 경험, 유무형의 자원을 총동원해 자식들의 미래상을 상상한다. 하지만 ‘부모의 미래학’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첫째, 내 자식 예외주의. 다른 아이는 어떨지 몰라도 내 자식만은 부모의 치밀한 설계에 따라 잘 움직일 것이라는 가정. 주관적 희망인데, 경험적으로 알 수 있듯 그것이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둘째, 미래 추론의 척도가 현재의 지배적 가치에 의존해 있다는 것. 성공과 전문직, 높은 보수와 행복한 가정 등. 그러나 인구 감소와 성장경제의 종언이라는 조건만 고려해봐도 10년 또는 20년 후의 세계는 현재와 상당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셋째, 이도 저도 안 된다면, 상속 등을 통한 자산 이전이나 국외 이민을 통한 우회 전략을 통해 ‘다른 전망’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가정. 그러나 현재 자산가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 시장 역시 쇠퇴할 것이며, 최근 유럽에서 보듯 ‘배외적 내셔널리즘’이 확산함에 따라 반(反)이민 장벽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식의 미래’와 동시에 ‘인류의 미래’를 고뇌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자식의 미래’란 여러 ‘예외주의’를 투사해 미래를 의지적으로 낙관하게 하지만, ‘인류의 미래’란 비극적 현실주의의 수용을 통해 우리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탈성장’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자본주의 성장경제는 식량, 에너지, 인구 증가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 그런데 식량은 기후변화로, 에너지는 피크오일로, 인구수는 소자고령화(小子高齡化) 추세로 전환되고 있다. ‘탈성장’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둘째,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간노동의 축소. 지난해 일본의 총리실 산하 프런티어 위원회가 ‘40살 정년제’를 제안해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힌 바 있다. 제러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개념을 의식해 그런 보고서를 작성했던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 발전과 인구수 감소가 이 논리의 핵심 근거였다.

셋째, 인구 감소와 자본주의의 쇠퇴. 인구 감소는 사회적 총수요를 축소시키는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축소를, 기업 입장에서는 이윤율의 하락을 의미한다. 고용이 축소되면 실업이 증가하고, 특히 청년들이 가장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부동산 거품의 붕괴도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인간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면 ‘축소 지향의 삶’과 ‘관계 지향의 삶’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인간적 삶의 척도 역시 ‘물질적 부’에서 ‘사회적 행복’과 ‘좋은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프랑스의 우파 대통령 사르코지조차 취임 직후 부탄식의 국민총행복(GNH) 지수를 연구했던 것은 이런 까닭이다.

‘성장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 ‘탈성장’ 또는 ‘제로성장’으로의 패러다임 교체를 대비해야 한다. 교육의 목표 역시 승리와 경쟁이 아닌 사회적 공존과 협력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의 임금노동 역시 ‘기본소득’과 같은 국민배당제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체계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압력솥의 증기를 빼듯 과열된 물질주의적 압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한가. ‘인류의 미래’라 간주하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치지만, ‘자식의 미래’라고 말하면 다급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예측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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