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25 18:41
수정 : 2014.03.2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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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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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5억원짜리 49일간의 노역’ 판결. 이 판결은 우리 사회의 상식과 정의감에 큰 상처를 냈다. 법 논리는 제쳐두자. 이 판결에 관여한 판사·검사에게 묻고 싶다.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았는지? 벌금 500만원이 없어 하루 5만원으로 100일간의 노역을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상실감을, 이 판결에 대해 대다수 시민들이 느끼게 될 분노를 조금이라도 고려했는지 말이다.
“이렇게 하면 부유한 사람은 살고 가난한 사람은 죽을 것이니, 빈부에 따라 형벌이 달라져 법에 일관성이 없어진다.” 중국의 역사서 <한서>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중국 고대에도 벌금형은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한 형벌이라는 이유로 이를 반대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속전(贖錢)은 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이다. 한나라 때 사마천이 속전 50만전을 구하지 못해 궁형을 당한 일은 잘 알려져 있는 일화다. 조선시대에도 ‘속전’제도가 있었다. 속전제도는 당시 계급사회에서의 신분 차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벌금형 제도는 고대의 그것과 다르다.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고 단기의 자유형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그러나 벌금형이 노역장 유치와 연결되면 과거 벌금형 제도의 차별적 성격이 다시 드러난다. 형사사건의 약 90%는 벌금형으로 종결된다. 그중 1년에 약 4만명이 벌금 낼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되고 있다. 한마디로 돈 없으면 감옥 가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그 강제노역 기간을 정함에 있어서 합리적인 기준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현대에도 벌금형은 부유한 사람에게는 선처가 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일수벌금제는 이런 벌금형 제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범행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하고 피고인의 재산 정도를 기준으로 산정한 금액에 일정 비율을 곱해 최종 벌금액수를 정하는 식이다. 벌금을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리 부과해야 적절한 징벌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제도다. 소득 수준에 비례하는 벌금을 부과하게 되므로 강제노역의 가능성도 그만큼 줄어들 수 있다.
국내에서 일수벌금제 도입은 1992년 형사법 전면개정 과정 이후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지만 법제화에 이르지는 못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기된 적이 있다. “생계형 픽업차량들이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내는 벌금과 벤츠 승용차 운전자가 위반해서 내는 벌금이 같은데 그게 공정사회 기준에 맞느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이러한 ‘소득연계형 범칙금 제도’를 제기했을 때 민주당은 ‘친서민 정치쇼’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일수벌금제의 문제는 단순히 포퓰리즘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정한 형벌, 즉 형벌 정의와 관련된 문제다. 형벌의 부과에 있어서 실질적·내용적 평등을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산술적 평등을 강조할 것인지의 문제인 것이다. 공정한 형벌은 공정한 조세, 공정한 복지의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당시 정치권은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논쟁을 실질적으로 확산했어야 했다.
최근 여권에서도 정의의 핵심 원리를 ‘공정’으로 파악하고 공정한 사회를 강조하고 있다. ‘공정사회’의 구체적 내용은 사회적 논의를 통해 확인하고 가다듬어 가야 할 개념이다. 이번 ‘황제노역’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공정한 형벌, 공정한 사회에 대한 논의로 확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없는 사회, 가난이 엄벌의 대상이 되고 가난이 죽음의 원인이 되는 사회는 결코 공정한 사회일 수 없다는 점이 확인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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