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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5 18:36 수정 : 2014.04.15 18:36

정정훈 변호사

이주노동자는 앞으로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에는 퇴직금의 대부분을 받을 수 없다. 사업주가 퇴직금으로 적립해 놓은 출국만기보험금을 출국해야만 지급받을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었기 때문이다. 법을 개정한 이유는 ‘불법체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다. 국회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나른한 표정으로 이 법안을 통과시켰을 그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그들은 모른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그 고단한 노동의 결과 손에 쥐는 임금과 퇴직금이 노동자와 가족에게 주는 의미를. 온전히 지급되는 임금과 퇴직금이 가족에 대한 그들의 작은 자부심이라는 것을. 매월 1000만원이 넘는 세비를 받으면서 월급 떼일 걱정 없는 그들은 모른다. 그러니 남의 임금 가지고 이리저리 재단할 생각이나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 이주노동자는 대부분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 사업주가 임금을 제때에 주지 않아 사업장을 변경하려면 2~3개월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이때 퇴직금은 최소한의 생존을 지탱해줄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제 법으로 보장하는 퇴직금이 있음에도, 국내에 체류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구직 기간 동안 퇴직금을 쪼개서 가족들에게 보내줄 수도, 스스로의 월세와 식비로 사용할 수도 없다. 구직 기간 동안 그들은 생존의 한계상황에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고려하고 법을 만든 것일까?

고용노동부의 답변도 가관이다. 노동부는 개정된 제도의 취지를 묻는 질의에 대하여, ‘사업장 변경 시마다 출국만기보험금을 받기보다는 전체를 모아 출국할 때 지급받는 것이 목돈을 마련할 수 있어 본국에 정착하는 자금으로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답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정부가 제도를 고쳐 ‘목돈’을 마련해 주겠다는데 웬 딴소리냐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강제저금을 금지한다. 급여와 퇴직금에 대해서는 압류도 제한된다. 근로자와 그 가족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노동부의 설명대로라면, 정부가 ‘목돈’을 핑계로 이주노동자의 퇴직금을 압류해 놓거나 강제저금을 들도록 한 것이다. 이는 나쁜 사업주의 변명은 될지언정 정부의 답변은 될 수 없다. 우리 법은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업주를 처벌하고, 임금이 제때에 지급되지 않을 경우에는 연 20%의 지연손해금을 청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법이 개정됨으로써,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근로기준법의 이러한 취지들이 모두 한방에 날아가 버렸다. 퇴직금은 그들의 출국을 담보하기 위하여 법에 의해 압류되었다. 개정 법률은 인간의 ‘존엄’은 물론이고 ‘생존’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법이 가능했을까? 국회 속기록을 뒤져봐도 찾을 수가 없다.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이러한 개정안이 근로기준법과 충돌하고, 헌법에서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근로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표결 결과 재석 231명 중 찬성 227명, 기권 4명으로 가결되었다. 한번의 진지한 토론도 없이, 단 한명의 반대 의사도 없이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국회라는 공간에서 유령이었다. 노동을 이야기하는 진보정당 소속 의원도, 약자를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야당 소속 의원도, 민생과 새정치를 이야기하는 의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법’이 되는 것이 이렇게 쉬웠다는 게 무섭기도 하다. 시인 김석환의 표현처럼 ‘밥이 법이다.’ ‘밥’이야말로 무거운 ‘법’(法)이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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