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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5.01 18:51 수정 : 2014.05.01 18:51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세계의 악당들을 조지고 부수는 것만 좋아했던 미국의 43대 대통령인 조지 부시였지만 9·11 테러 당시 그의 리더십은 어쩔 수 없이 칭찬하게 된다. 테러가 일어난 그날에만 대통령 담화가 3번 발표되었다. 사건의 성격 규정, 국민의 단결 호소, 새로운 전쟁에서 전세계의 지지 확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발표된 담화였다. 이후로도 사흘간 총 11번의 대통령 담화가 있었다. 같은 기간 각 부처 장관들의 브리핑은 총 50회가 넘는다. 먼지가 자욱한 테러 현장에서 소방관과 함께 서서 이 대형 재난을 조속히 극복하자는 대통령과 정부의 결의가 과시되자 부시의 지지율은 치솟았다.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을 보호한다는 강한 의지는 위기의 순간에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었고, 국민은 아낌없는 지지와 성원으로 이에 화답했다. 이걸 일컬어 소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에서는 위기에서 대통령이 국민을 보호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성난 민심과 질타로부터 대통령이 보호받는 존재가 된다. 2010년에 천안함 사건이 나고 이명박 대통령의 제대로 된 담화는 59일이 지나서였고, 연평도 사건 당시에는 7일이 걸렸다. 국방장관 담화는 단 2번이다. 가장 불안한 시간에 대통령과 장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지하 벙커에서 장관들과 주야장천 회의만 했단다. 같은 시간에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의 말을 마사지하기에 바빴다. 이 지점에서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이미지는 정반대로 굳어진다. 대통령 지지율은 폭락하고 책임질 총리와 장관들이 곧이어 닥칠 개각에 사형수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 대통령이 재난 전문가가 아닌 바에야 사태 수습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국민을 직접 챙기는 거버넌스를 구현해야 했다. 그런데 한국의 정치문화에서는 이게 제일 힘들다. 그 결과 정치지도자와 국민은 서로 분열된다.

지금 그런 일이 또 반복되고 있다. 행여 말실수할까봐 박근혜 대통령은 말을 조근조근하게, 글을 또박또박 읽는다. 여기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갑론을박하면서 설득하고 경청하고 함께 울고 웃는 건 못한다. 몸짓 하나하나에도 어린 시절부터 배어온 ‘바른생활 소녀’의 습성이 배어 있지만 여기에는 현장이 없고, 함께 울고 웃는 공감이 없다. 정식으로 사과하는 건 사태 수습 이후에나 하겠단다. 그런데 이 모든 참사의 원인을 대통령이 다 책임질 수 없는 것이라면 사과가 중요한 게 아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용기 있게 맨 앞에 나서고, 국민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지도자. 국민이 자신에게 기대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호원에게 둘러싸여 유족의 접근이 차단되었으며,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공격은 전달되기도 전에 청와대 대변인이 막았고, 청와대의 재난관리 책임은 안보실장이 나서서 변명했다. 이런 대통령은 소통의 광장 뒤편의 밀실에서 보호받는 존재다.

대통령의 위기 극복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나 국무회의장에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명확한 방향과 의지 위에서 이루어진다. 국가의 안전이라는 것은 불굴의 용기와 소통의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 없이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신의 불이익을 무릅쓰고 국민의 편에서 행동하는 리더십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품행이 방정한 장관들도 우리를 실망시켰다. 여기서 우리의 사회적 자본이라 할 수 있는 신뢰가 증발되었다. 그렇다면 국민의 안전은 누가 책임질 것이며, 지정학적 도전이 엄중한 이 나라의 안보는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정부에 대한 불신과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10대만 탓할 것인가? 그게 과연 문제의 핵심일까?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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